■ 훈구勳舊와 사림士林의 대립 2편
■ 훈구(勳舊)와 사림(士林)의 대립 2편
성종이 승하한 후 원자 융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그가 연산군이다. 그의 어머니는 성종의 비(妃)에서 폐위당한 윤씨이다. 연산군이 새로 왕위에 올랐을 때 조정과 민간에서는 모두 ‘영명(英明)한 임금’이라 일컬었다. ‘영명한 군주’라는 평판을 듣던 연산군이 즉위식보다 더 먼저 거쳐야 할 가장 큰 관문이 바로 선왕(先王)의 장례를 주관하는 일이었다. 선왕 시신의 염습(殮襲:관에 안치함)을 마치고 대신들과 장례절차를 논의하다가 연산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렸다. 그는 부왕의 장례를 주관하면서 처음으로 정치적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그동안 관습적으로 내려오던 불교식 장례 절차를 놓고 신료들과 논쟁을 벌인 것이었다.
조선은 유교 국가이므로 당연히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성종의 장례를 불교식 관례대로 진행하는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의의를 제기한 사람은 당대 대문호(文豪)로 알려진 예조판서(禮를 주관하는 부서) 성현이었다.
성현은 성종 승하 직후,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인 세자 융에게 말하기를, “조정의 구례(舊例)로는 국상(國恤) 칠칠일(七七日) 및 소대상(小大祥)에는 모두 절에서 재(齋)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문(禮文)에는 없는 것으로, 유학의 가르침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대행대왕(大行大王:임금이나 왕비가 죽은 뒤, 시호를 정하기 전 칭호, 죽은 성종을 가르킴)께서도 불교를 믿지 않으셨는데, 이번에는 어찌 하오리까?”
이 말을 들은 세자는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내시 김효강을 왕비(성종의 계비:정현왕후)에게 보내 여쭈어 보기로 하였다. 그러자 왕비는 “대행대왕께서 불교를 좋아하지는 않으셨으나, 재를 지내지 말라는 유교(遺敎)가 없었으며, 또 그동안 선대(先代)에서도 다 행하셨으니, 이제 와서 폐지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성종의 장례식은 선대(先代)와 마찬가지로 불교식 장례절차를 진행하게 되었다. 이 일에 대해 《연산군일기》에서는 『세자가 이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왕비에게 문의한 것이며, 왕비의 의견에 따라 시행한 것』이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과연 연산군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해서 왕비의 의견을 물은 것일까? 이후에 전개되는 상황을 보면 연산군의 의지임이 명백히 나타난다.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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