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훈구勳舊와 사림士林의 대립 3편
■ 훈구(勳舊)와 사림(士林)의 대립 3편
예조판서 성현이 문제를 제기한 다음 날 사헌부 장령 강백진, 사간원 정언 이의손 등은 불교식 장례절차인 수륙재(水陸齋:떠도는 잡귀를 쫓는 재) 시행에 반대하면서 말하기를,
“대행대왕을 위하여 수륙재(水陸齋)를 시행하라는 전교(傳敎)를 들었습니다. 대행대왕께서 일찍이 불법(佛法)을 좋아하지 않으셨고, 또 지금 신정(新政)으로 신민이 좋은 정치를 바라는 시기이니, 사도(邪道)를 버리고 예문(禮文)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삼사(三司)의 반대에 연산군은 이렇게 말하였다.
“선왕께서 어찌 다 불법을 좋아하셨으랴마는, 수륙재의 거행은 선대(先代)로부터 이미 그러하였고, 대행대왕께서도 그만두라는 유명(遺命)이 없었으니, 이제 와서 폐지할 수는 없다.”
연산군의 의지가 분명히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에도 홍문관부제학 성세명, 예문관 봉교 이소 등은 불사(佛事)의 중단을 요구하였으며, 홍문관 관리 손주는 수륙재에 사용할 글을 지으라는 국왕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이후 이 일은 일파만파(一波萬波)로 확대되어, 해가 바뀌고 젊은 성균관 유생들마저 요즘으로 말하면 집단 등교거부로 공부를 버리고 집단상소하는 움직임까지 보이게 되었다. 물론 이를 반대한 경우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당시 정승의 지위에 있던 노사신은 연산군을 편들고 나섰다.
“일에는 늦출 것과 서두를 것이 있는데, 지금 재를 지내는 한 가지 일이 나라의 흥망(興亡)이 조석에 달린 중대한 일이라면 몰라도, 선왕을 위하여 재를 지내는 것은 선대왕(先大王)때 부터의 관습이니, 이 일을 가지고 불교를 숭상하는 것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곡위(哭位)에서 애달프신 이 때 할 일을 버리고 대궐에 모여서 논란만 하니, 신은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라 여기며, 큰 일 외에 이런 일은 반드시 논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로 사림파들이 등용된 삼사(三司)는 자신들의 의견이 조금이라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즉시 사직했다. 사직은 60~70번에서 1백 번까지 지속되기도 했다(1497년 6월 12일). 연산군도 이런 삼사의 행태에 큰 분노를 거듭 표명했지만, 그들은 좀처럼 제어되지 않았다. 스스로 인정했듯이 삼사는 연산군이 즉위한 이래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상소를 올렸고(1496년 3월14일), 사안에 따라 그 기간은 57일 동안 지속되기도 했다(1497년 4월25일).
훈구대신과 삼사의 갈등도 증폭되었다. 특히 대신들을 겨냥한 삼사의 탄핵이 매우 거칠어졌다. 이로써 연산군대 초반 국왕·대신·삼사의 상호관계는 명확해졌다. 국왕은 삼사의 강력한 언론활동을 가장 심각한 폐단인 능상(凌上:임금을 깔보다)으로 규정했고, 일부 대신들은 거기에 깊이 동조했다. 국왕은 삼사의 언론을 계속 불만스럽게 생각했고 강력히 경고했지만, 삼사는 훈구대신들을 극단적인 표현으로 탄핵했고,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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