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훈구勳舊와 사림士林의 대립 4편
■ 훈구(勳舊)와 사림(士林)의 대립 4편
성종 후반부터 이미 삼사(三司)의 권위는 지나친 수준까지 팽창했다. 붕어(崩御:돌아가심)하기 직전 성종은 당시의 정국을 “두 마리 호랑이가 싸우는 것 같으니 참으로 아름답지 못한 일이다”라고 개탄했다(성종25년 5월 5일). 성종은 삼사의 활동을 제도로 보장하고 후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현실적 갈등을 말끔하게 봉합하지 못한 채 승하(昇遐)하게 되었다.
삼사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유교정치 실현에 있어서는 의미 있는 발전이었지만, 국왕과 대신의 입장에서는 불편하고 불만스러운 것이 분명했다. 즉위 직후부터 왕권 강화에 남다른 관심과 의지를 보인 연산군에게는 더욱 그랬다.
선왕의 장례를 어떻게 치를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시작된 논쟁은 이후 계속 확대되어 나갔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단지 장례를 불교식으로 치를 것인가 아닌가 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연산군 즉위 초 정치세력의 주도권 동향과 관련된 것이고, 왕권의 향방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치세 초반부터 이렇게 연산군·대신과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는 수륙재(水陸齋)의 시행뿐만 아니라, 외척·내시의 임용과 포상, 폐모(폐비 윤씨)의 추숭(追崇) 등 거의 모든 사안에서 충돌했다.
연산군이 추진하려는 불사(佛事)를 반대하는 세력들은 대개 부왕인 성종 대에 등용되었던 사림세력들이거나 그들과 정치적 성향을 같이 하는 세력들이었다. 사림세력들은 성리학으로 이론적 기반을 확고히 하여 조선 사회를 유교적 이상사회로 재편(再編)하려는 세력이었다. 유교적 이상사회는 공자가 지향하던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이상으로 하며, 패권(覇權)정치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사림세력들은 임금과 신하가 함께 다스리는 정치, 이른바 군신공치(君臣共治)를 정치적 이상으로 하였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연산군의 불교식 장례 주장은 그들이 구상하는 모습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던 것이다. 연산군의 행동은 패권(覇權)정치를 지향하는 독단적 행동으로 보일 뿐이었고, 사림파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로써 두 세력은 일마다 대립하였고,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적대관계로까지 진행되어 갔다. 결국 유교적 이상사회를 지향하는 젊은 사림세력과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훈구세력과의 대결양상은 첨예화되어 갔다.
만약, 성종이었다면 강력한 왕권으로 어느 한쪽도 기울지 않으면서 현명하게 양쪽 세력의 균형과 견제를 유지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새롭게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아직 두 세력 사이에서 균형과 중심을 잡기보다는, 오히려 초반 우위를 선점(先占)하기 위해서 강압적으로 이를 밀어붙이려고만 했던 것이다. 그 결과 상당수의 성균관 유생들에게 과거시험 응시를 제한하는 정거(停擧) 조치를 내려 왕의 의지를 강력히 표현하였다. 형식적으로는 연산군의 승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후 양자(兩者)의 정치적 대립은 더욱 골이 깊어졌고, 그것이 표면화되면서 피바람을 몰고 올 사화(士禍)의 서막(序幕)이 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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