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8일 월요일

태실胎室 수난기 1편

■ 태실胎室 수난기 1편

■ 태실(胎室) 수난기 1편

일제강점기 일본은 풍수설을 역이용하여 명산마다 쇠말뚝을 박고 지맥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터이다. 조선왕조의 기운을 쇠하게 만들기 위함이라 하는데, 그 만행이 조선왕조의 태봉에까지도 미쳐 태실은 수난을 당하게 된다. 태실지가 왕조의 번영을 위한 목적에서 조성된 것이라는 것을 간파한 일제는 전국의 태실 주변에 신작로를 내거나, 태실을 고의적으로 훼손하기 시작했다.

조선왕조가 멸망한 1910년, 일제는 왕실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11월에 일본 궁내성 소속 이왕직(李王職)이라는 기관을 설치했다. 이왕직은 조선왕조를 이씨조선(李朝)이라고 폄하하는 작업부터 시작해 왕실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일에 몰두한다. 경복궁 일부를 헐어내어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를 건립하고, 궁에서 철거한 목재는 일본인들의 별장이나 요정을 짓는데 사용했다. 또한 창경궁을 유원지화 하여 동물원과 식물원을 개설하고 관람을 이유로 일반인의 출입을 자유롭게 하였다. 순종 서거 2년 후인 1928년 조선총독부는 이왕직의 이름으로 태실 정리를 계획하고 전국에 묻어둔 조선 왕의 태 53기를 파헤쳐 ‘서삼릉’으로 옮겼다. 태를 담았던 조선 백자들은 거의 모두 도굴 당했음은 물론이다. 태실이 있던 명당자리에는 일제시대 권력가(조선인, 일본인)들의 무덤이 들어앉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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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시 삼송리에 있는 사적 제200호인 서삼릉(西三陵)은 조선말기 왕실의 가족 묘지이다. 서삼릉은 희릉, 효릉, 예릉의 3릉이 서울 서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칭호이다. 희릉(중종계비 장경왕후 윤씨), 효릉(인종과 인성왕후), 예릉(철종와 철인왕후)과 조선 역대 왕들의 태(태)가 묻혀있는 태실 54위, 폐비 윤씨의 회묘, 공주, 옹주, 후궁들의 묘지 등 7개 구역으로 이뤄져 있다. 또한 역대 3세자의 묘인 의령원(사도세자의 장자인 의소세손), 효창원(정조의 장자인 문효세자), 소경원(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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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왕릉 경역 내에는 후궁, 왕자, 공주 등 왕이 아닌 신분의 묘나 태실을 둘 수 없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망하자, 일제가 망국왕실을 관리한다는 명목 하에 전국 각지에서 왕자, 공주, 옹주들의 태를 옮겨와 서삼릉에 일괄 집장(執藏)함으로서 서삼릉은 왕릉으로서의 존엄과 품격마저 잃게 된 것이다. 일제는 태실을 마치 공동묘지처럼 서삼릉에 한꺼번에 안치했는데, 그 배열을 날 일(日)자 형태로 하여 신사 분위기를 연출하기까지 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