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6일 토요일

중종의 여인들 장경왕후 1편

■ 중종의 여인들 장경왕후 1편

■ 중종의 여인들 장경왕후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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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은 부인 12명(왕비와 후궁), 자녀 20명(9남 11녀)를 두었다. 아버지 성종처럼 부인도 많고 자녀도 많다. 父傳子傳(부전자전) 이라고 할까. 중종은 성종과 정현왕후 사이에 태어난 진성대군이다. 성종과 폐비윤씨 사이에 태어난 이복형 연산군을 몰아내고 반정군에 의해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다. 이를 중종반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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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공신들은 조강지처인 첫째부인 신씨를 7일 만에(최단기 중전) 사가(私家)로 내친 다음날부터 중종에게 서둘러 중전을 책봉하라고 보챘다. 그들의 내심은 하루빨리 자신들의 세력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이미 내정된 공신의 여식(女息)을 왕비로 삼아 내명부를 장악하여 권력을 다지려는 것이었다. 중종의 어머니 정현대비는 “중궁 간택은 용모만 보아서는 안 된다. 두세 명의 처녀를 간택하여 후궁에 두었다가 그 행실을 보아 중궁으로 임명하자.” 라고 제안했다.

공신들은 그녀의 뜻을 받아들여 숙의 윤씨, 숙의 박씨, 숙의 홍씨가 입궁했다. 숙의 윤씨는 박원종의 조카딸(윤여필의 딸)로서 훗날 인종을 낳은 장경왕후 윤씨이다. 또 숙의 박씨는 상주 출신으로 복성군을 낳고 궐내에 숱한 파란을 일으켰던 경빈 박씨이다. 숙의 홍씨는 반정공신이자 훗날 기묘사화를 주도한 홍경주의 딸이다.

1508년(중종 2년) 1월 18일 실권을 쥐고 있던 박원종은 유순정과 함께 중종을 찾아와 서둘러 중궁을 정하라고 재촉했다. 중종이 차일피일 결정을 미루자 5월에는 대간을 동원하여 왕비 간택을 재촉했다. 그들의 등쌀에 지쳐버린 중종은 6월 17일 숙의 윤씨를 왕비로 결정하고, 두 달 뒤인 8월 4일 근정전에서 책봉례를 거행했다. 이처럼 단경왕후 신씨의 폐출이나 장경왕후 윤씨의 책립은 모두 박원종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새로운 중전이 책봉됨과 동시에 이미 쫓겨난 신씨(단경왕후)는 혹시나 하는 기대도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완전히 짝 잃은 기러기 신세가 되어 버렸다. 자식도 없고 남편도 없는 그녀는 재혼조차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원망과 그리움으로 쓸쓸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두 번째 부인이 된 장경왕후는 성종 22년(1491년) 7월에 파평 윤씨 윤여필과 어머니 순천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8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이모인 월산대군의 부인에게서 자랐다. 외삼촌은 당연히 반정의 주역인 박원종이다. 신씨가 쫓겨나자마자 16살에 후궁으로 입궐하여 숙의에 봉해졌다가 중종 즉위 2년 8개월 만에 중전이 되었다. 그로부터 8년 후 딸 하나(효혜공주)와 아들 하나(원자:뒷날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25세의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장경왕후의 산후병을 돌본 사람이 바로 ‘대장금’ 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장금에 대한 기록이 요리사가 아닌 의녀로 10번 등장한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