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종의 여인들 장경왕후 2편
■ 중종의 여인들 장경왕후 2편
장경왕후의 죽음은 정치적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장경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왕비 자리는 다시 비게 되었다. 그 당시 숙의 박씨에게는 아들 복성군이 있었는데, 복성군은 장경왕후가 낳은 원자(元子:훗날 인종)보다 위였고, 숙의 박씨 또한 후궁 중에서 가장 총애를 받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자신이 중전이 될 것이라는 야심을 가지고 엉뚱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해 8월 8일,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군수 김정, 무안현감 유옥이 첫째부인 폐비 신씨를 복위하고, 과거 중종을 위협하여 신씨를 폐출시킨 박원종의 관직을 추탈하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세 사람은 일찍이 전라북도 순창의 강천산 계곡에서 회동한 뒤 목숨을 걸고 폐비 신씨의 복위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하고 각자의 관인을 소나무 가지에 걸어놓고 맹세했다. 훗날 그들이 상소를 결의한 장소를 삼인대(三印臺)라고 하고 그 상소를 일컬어 ‘삼인대 상소’라고 불렀다.
그 무렵 중종반정을 주도했던 공신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은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난 뒤였으므로, 세 사람은 이 때를 기회라고 생각하여 폐비 신씨를 복위시킴으로써 대의를 실현하고 그녀의 원통함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린 것이다. 세 사람은 이 상소문에서 우선 국모의 위중한 지위를 강조하면서 중대한 이유와 명분 없이 신씨를 폐출하였음을 지적했다. 아울러 장경왕후의 죽음으로 비어있는 왕비의 자리에 부당하게 쫓겨난 신씨를 복위시켜야 하며, 동시에 폐출에 가담한 박원종 등 공신들의 행위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그들은 박원종 등이 중종의 대통 계승이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연산군이 선위(禪位)한 것으로 조작하여 명나라에 보고했음을 지적하면서, 공명정대한 대의를 은폐한 자들을 처단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리고 장차 후궁이 중전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금할 것을 주장했다. 대간들은 그들이 임금과 관련된 민감한 부분을 지적했으니 그 죄를 물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사림에서는 이들의 상소는 정당한 내용이며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맞섰다.
1515년(중종 10년) 8월 21일, 의정부에서는 상소문을 올린 이들에 대하여 장 100대, 유배 3년에 삭탈관직(削奪官職)을 건의했지만, 중종은 장형을 감하고 각각 남평과 보은 등지로 유배형에 처하라고 명했다. 그런데 그해 11월에 조광조는 언로(言路)를 넓히고 상소를 자유로이 허용하는 것이 옳거늘 대간들이 거꾸로 상소문을 트집삼아 죄를 청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며 대간(사헌부, 사간원)들의 파직(罷職)을 청함으로써 한동안 조정이 시끄러웠다.
1516년(중종11년) 4월, 중종이 그 해 거듭되는 천재지변에 대한 대책을 널리 자문하자 대신과 간관들은 일제히 김정(삼인대상소) 등을 석방하여 언로를 넓히라고 주청했다. 그러자 중종은 5월 김정 등의 죄를 용서하고 유배를 해제함으로써 폐비 신씨 복위상소와 관련된 논란은 종지부를 찍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