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 1편
■ 임진왜란 1편
16세기 후반, 조선은 집권세력인 동인과 서인 간의 정쟁이 심하여 위태로운 상황에 있었다. 유럽은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진출하여 세력을 넓히고 있었고, 일본 역시 이러한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물결에 부응하여 대륙으로의 침략을 꾀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이미 포르투갈과 무역을 하면서 조총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 대량 생산하는 기술을 습득하여 대량생산하기 시작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는 일본 천하를 제패하고 대륙 침공 작전에 착수하였다. 동아시아의 판도를 뒤흔든 임진왜란이 발생한 것이다.
1590년 조선은 일본에 황윤길과 김성일을 통신사로 파견하였다. 이듬해 이들이 돌아와 ‘전쟁설’에 대해 선조에게 보고한 내용이 서로 달라 그나마 전쟁 대비를 하려는 의견을 모두 거두게 만들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려는 의도가 공공연하게 조선에 전해졌으나 이를 사람들은 믿지 않고 전쟁 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1592년 4월 2일 저녁 무렵, 왜장 고니시의 제1군은 일기도의 가쓰모토 항에 도착했다. 4월 7일 밤, 제1군은 그 동안 역풍 때문에 어려움을 겪다가 겨우 대마도의 완노우라항에 입항하였으나 역풍이 점점 더 세차게 불어 할 수 없이 수일 간 이 곳에서 대기한다. 4월 10일 밤, 갑자기 바다가 잠잠해지더니 바람의 방향이 순풍으로 바뀌었다. 항해가 예정보다 늦어 초조했던 선봉장 유키나가는 날이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 날 밤으로 출항 명령을 내렸다. 그곳에서 조선의 부산포까지의 거리는 불과 50km에 불과했다. 4월 13일 이른 새벽, 고니시의 제1군과 그 꼬리를 물고 온 가토의 제2군은 목적지인 부산포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 부산포의 첨절제사 정발은 오랜 습관대로 수하 병졸 몇 명만 데리고 자신의 관내를 순찰하고 있었다. (일부 기록에선 사냥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정발과 그의 일행이 순찰을 위해 부산진성을 나와 절영도(영도)에 도착했을 때 아직 채 밝지 않은 새벽 바다위로 수백 척의 왜선들이 바람을 등에 업고 무서운 속도로 전진해 오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동안 소문만 무성하던 왜적의 침입이 현실로 나타났음을 직감한 정발은 즉시 부산진성으로 돌아가 휘하 병사 700여 명 전원을 비상소집하여 왜적 침입상황을 알리고 즉각 전투태세를 갖추게 하는 한편, 동래성으로 전쟁 발발의 긴급 상황을 알리는 파발마를 띄웠다.
새벽안개를 뚫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제1군 18,000명은 빠른 속도로 부산포 상륙작전을 마쳤고, 속수무책으로 언덕 위의 부산진성에서 왜적들의 상륙을 지켜보던 정발 첨사는 적의 규모가 엄청난데 경악하였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