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혜공주의 기구한 운명 2편
■ 경혜공주의 기구한 운명 2편
경혜공주가 혼인식을 올리고 아직 신혼집을 장만하기 전인 같은 해 2월 17일(1450년 3월 30일) 세종이 승하(昇遐)했다. 혼인한 직후에 할아버지가 사망했으니 살림집 준비는 일단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살림집을 마련한 것은 세종의 소상(小祥:사망 1주기 식)이 끝난 뒤였다. 아버지가 왕(문종)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경혜공주의 신분은 공주(公主)였다. 하지만, 공주의 불운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할아버지 세종의 삼년상을 끝내고 한 달 뒤에 아버지 문종마저 쓰러진 것이었다. 공주의 입장에서는 할아버지의 삼년상에 이어 아버지의 삼년상까지 치러야 했으니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겪었을 것이다. 이때 그녀의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의 삼년상이 채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훗날 세조)이 계유정난(癸酉靖難:1453년)을 일으켰다. 공주의 동생 단종은 허수아비 임금으로 전락했다. 이때 공주는 열여덟 살이었다. 2년 뒤인 스무 살 때, 공주는 숙부 수양대군이 임금이 되고 동생이 상왕으로 물러났을 뿐 아니라, 남편인 정종이 강원도 영월로 귀양 가는 슬픔을 연달아 맛봐야 했다. 남편 정종이 귀양을 간 것은, 그가 단종을 감싸고 도는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수양대군의 동생)과 친했기 때문이었다. 정종은 영월에서 경기도 양근(지금의 양평군 일부), 한성, 수원 및 김포 등지로 유배지가 변경되었다. 유배지가 수원으로 바뀐 뒤부터는 공주도 남편과 동행했다. 세조는 경혜공주가 원한다면 정종를 따라 가도 좋다고 허락했다. 경혜공주에 대한 마지막 배려였다. 그리하여 경혜공주는 남편을 따라 수원, 통진에 이어 광주까지 가게 되었다.
경혜공주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초상과 단종의 강제 양위 등 연이은 불행으로 인해 계속 각방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가 없었는데, 이후 25살이던 경혜공주는 혼인 9년 만에 유배지에서 장남 정미수를 출산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공주의 신분이었고, 그녀 자신은 죄인이 아니기에 유배지에서도 종을 부리는 등 최소한의 품위유지는 한 듯하다. 비록 유배지이기는 했지만 경혜공주는 남편과 함께 비교적 편안하게 지냈다. 그러나 그 생활도 오래 가지 못했다.
세조 집권 뒤에 발생한 사육신사건(1456년)은 공주를 더욱 불행하게 만들었다. 단종 복위를 꾀한 이 사건으로 그렇지 않아도 복위운동이 일어날까 긴장하고 있던 세조와 측근들은 이 사건을 빌미로 그 싹을 자르려 하였다. 상왕(上王) 단종은 삼엄한 감시를 받아야 했고, 정종 또한 가혹한 처벌을 피하지 못했다. 유배 중이던 정종을 시종하던 종들은 모두 지방의 관노로 쫓겨났다. 그 뿐만 아니라 정종의 모든 재산이 몰수되었다. 혹시라도 정종과 상왕 단종 사이에 연결고리가 될 수 있는 인맥과 자금을 차단하려는 조치였다. 정종의 유배지도 경기도 통진에서 더 멀리 전라도 광주로 바뀌었다. 정종을 상왕(上王) 단종이 머무는 한양에서 멀리 떨어뜨려 서로 접촉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