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혜공주의 기구한 운명 3편
■ 경혜공주의 기구한 운명 3편
광주 유배지는 통진에 비해 감시가 훨씬 심했다. 집 주변으로 담장과 난간이 높직하게 둘러 처져 있었으며, 감시병들도 많았다. 게다가 남자 종은 부릴 수 없었고, 여종 세 명만 부릴 수 있었다. 남자 종들을 시켜 무슨 음모를 꾸밀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공주의 동생인 단종은 상왕(上王)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 갔다가 이듬해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세조 3년(1457년) 10월 이후에는 정종에 대한 감시가 더더욱 강화되었다. 정종은 공공연히 세조에게 반감을 품은 발언을 하고 다녔고, 결국 세조 7년(1461년)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죄로 단종이 죽은 지 4년 뒤에 능지처참(陵遲處斬)에 처해져 죽었다. 그의 시신마저도 팔도로 흩어져 흔적조차 없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부모도, 동생도, 남편도 모두 잃은 공주의 나이는 겨우 스물여섯이었다. 남편이 사형당할 때 그녀는 둘째를 임신 중이었다.
임산부에 애까지 딸린 공주에게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여론이 일자, 이를 의식한 수양대군(세조)은 공주를 사면(赦免)하고 한성으로 불러들였다. 실록에서는 공주가 무척 가난하여 세조가 노비를 보내주고 내수사(內需司:궁중 물품관리 기관)로 하여금 집을 지어주게 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야사(野史)인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사육신 사건 이후 경혜공주는 전라도 순천부의 노비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순천부사가 그녀를 노비로 부리려 하자, 공주가 수령 집무실인 동헌에 들어가 의자에 앉으면서 “나는 왕의 딸이다. 비록 죄가 있어 귀양을 왔지만, 수령이 어찌 감히 내게 노비의 일을 시킨단 말이냐?”며 호통을 친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공주의 신분을 끝까지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편이 역모죄로 죽었으니 원래대로라면 연좌제로 경혜공주와 두 자녀는 노비가 되어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실록에도 정종이 죽고 반년만인 1462년 5월에 세조가 경혜공주에게 노비를 내려줄 것을 지시한 기록이 있고, 2012년에 발견된 경혜공주 사망 3일 전에 외아들 정미수에게 남긴 재산 상속에 관한 기록인 《경혜공주 분재기(分財記)》에서 "내가 불행히 병이 들어 유일한 아들인 미수가 아직 혼인도 못했는데 지금 홀연히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노비는 갑작스러운 사이에 낱낱이 기록해 줄 겨를이 없어 먼저 정선방(貞善坊)에 있는 하사받은 집과 통진(지금의 경기도 김포)에 있는 전답(田畓)을 준다"고 적혀 있다. 그러므로 야사가 허구라는 게 확실히 입증되었다.
경혜공주는 딸을 출산한 이후 두 아이를 왕궁에 맡기고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수양대군의 손자인 성종이 재위할 때 서른여덟의 짧은 삶을 마감하게 된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