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일 월요일

귀성군 이준과 남이장군 2편

■ 귀성군 이준과 남이장군 2편

■ 귀성군 이준과 남이장군 2편

남이는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영의정을 지낸 남재의 증손자이며, 태종의 외손자로(어머니가 태종의 4녀:정선공주) 태어났다. 남이는 1457년(세조3년) 17세의 나이로 무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남이는 평소 강직하고 굽힐 줄 모르는 성품을 지녔고 무예도 뛰어났다. 남이는 이시애의 난(함경도 지방의 차별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난)이 일어났을 때 귀성군 이준과 함께 대장군으로 출전하여 뛰어난 무공을 발휘하고 출세 길에 올랐다. 이어서 남이는 여진족 정벌에도 참여하여 일약 영웅으로 부각되었다.

세조는 이런 남이를 귀성군의 뒤를 잇는 병조판서에 제수했다. 나이는 귀성군과 같은 스물여덟이었다. 한명회를 비롯한 훈신들은 외척을 병조판서에 임명해서는 안 된다며 극렬하게 반대했지만 세조는 강행했다. 그만큼 남이를 믿고 총애했다. 그런데 남이는 귀성군 이준처럼 자신을 감출 줄 몰랐다. 남이는 자신의 야망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남이가 백두산에 올라 썼다는 시를 보면 남이의 호기(豪氣)와 기개(氣槪)를 짐작할 수 있다.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라

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안하게 못 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요』

하지만 이 시(詩)는 나중에 남이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젊은 종친세력의 등장을 경계하고 있던 한명회와 신숙주 등 훈구대신들에게 드러내놓고 호탕한 기개를 뽐내는 남이는 좋은 명분을 안겨주었고, 귀성군과 남이를 시기 질투했던 예종의 눈에도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예종은 즉위하자마자, ‘외척은 군권을 가져서는 안된다’ 는 훈신들의 주장에 따라 남이를 병조 판서에서 겸사복장(정예 왕실 친위대인 겸사복의 지휘관)으로 좌천시킨다.

이때 쯤 조선의 최대 간신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유자광이란 인물이 등장한다. 무예가 출중했던 유자광은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세조에게 자진 출병하겠다는 서한을 보내 세조의 눈에 든다. 그리고 이시애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워 서얼출신인데도 파격적으로 등용되었다. 그러나 유자광의 입장에서는 서얼출신이라는 이유로 충분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특히 나이가 비슷한 남이의 출세와 비교해 보면 더욱 그랬다. 그래서 불만이 쌓여있었다.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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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이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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