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안대군 2편
■ 제안대군 2편
조선시대에 한 남성이 처첩(妻妾)을 거느리는 것은 용인되었지만, 부인을 두 명 거느리는 것은 엄연히 불법이었다. 사헌부에서 이 문제를 제기해 전처 김씨는 친정으로 쫓겨났다. 그러던 중. 후처 박씨가 동성(同姓) 여성과의 추문이 불거졌다. 진위여부는 확실히 알수 없지만, 대왕대비 정희왕후와 왕대비 안순왕후는 제안대군의 박씨부인과의 이혼의사를 성종에게 전달했다. 성종은 박씨가 누명을 쓴 것으로 보고 별다르게 허물이 없음을 들어 반대하고, 신료들의 견해도 같음을 확인하지만, 안순왕후는 며느리 박씨가 불순함을 이유로 들어 신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혼을 허락했다. 그리하여 제안대군은 후처 박씨와도 이혼하고 드디어 혼자 몸이 되었다.
하지만, 이를 딱하게 여긴 성종이 장가들 것을 명하고 부인을 물색하자 제안대군은 “지금 듣건대 신을 위하여 여자를 고른다고 하시니 실망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며 차라리 전처 김씨와 재결합하겠다고 했다. “만약 들어주지 않으면 평생토록 홀로 살 것입니다”라며 버텼다. 제안대군의 고집에 결국 성종도 굴하여, 제안대군은 전처 김씨와 다시 살게 됐다. 하지만 제안대군은 김씨 부인은 물론 박씨 부인과의 사이에서도 한명의 자녀도 보지 않았다. 아마도 형식적으로 부인으로 맞이하기는 했지만, 끝까지 부인을 가까이 하지 않은 결과였다. 1498년(연산군4년) 안순왕후의 상(喪)을 입은 뒤부터는 홀로 거처하며, 평생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이처럼 제안대군이 두 명의 부인과 이혼과 재혼을 반복하고도 후사를 보지 않은 이유는, 여자에게 진짜로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왕족으로서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자신의 불행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과 속 깊은 마음 때문은 아니었을까. 진실은 제안대군만이 알 것 같다.
평생 음악에 심취하고 악기 연주하는 것을 좋아하며, 풍류를 즐겼다. 연산군도 놀기 좋아하는성격이었으므로 제안대군을 늘 가까이 하며 대접을 잘해 주었고, 시도 때도 없이 연회를 열었다. 둘은 죽이 잘 맞았고, 연산군도 제안대군에게는 특별히 경계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제안대군은 자신의 집 노비였던 장녹수를 연산군에게 바치기도 했다. 연산군도 네 차례나 음률(音律)을 아는 여자를 궁중으로 맞아들여 그에게 내렸으나 그는 따르지 않았다.
1506년(중종1년) 중종반정 직후에는 특별히 정국원종공신 1등에 봉해졌다. 그는 당질인 연산군과도 친분이 두터웠으나, 중종반정 이후에도 별다른 정쟁에 휘말리지 않았다. 연산군과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중종하고도 당숙부가 되므로 중종 20년(1525년) 60세의 나이로 타계하기까지 일생 왕실 종친으로 존대를 받았다. 그의 처세 덕분일 것이다.
연산군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가 꽤 많았다. 여기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인물이 제안대군이다. 임사홍 부자(父子)와 더불어 연산군의 폭정을 독려하는 인물로 그려지거나, 연산군의 모성결핍을 깊이 이해하고 위안을 주는 인물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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