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종의 여인들 경빈 박씨 2편
■ 중종의 여인들 경빈 박씨 2편
그때 경빈은 중종에게 세숫물을 올린다는 핑계로 강녕전으로 찾아 갔다. 중종이 문정왕후와 서침실에서 점심을 드는 동안 경빈은 동침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을 마친 중종이 동침실로 오다가 뜨락을 보니 죽은 쥐가 있었다. 별일 아니라 생각한 중종은 “가져다가 버려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궁녀들은 그 쥐를 문정왕후에게 보여줬다. 문정왕후가 즉시 정현대비에게 보고하자 정현대비는 크게 놀랐다. 누군가 동궁을 넘어 중종까지 죽이려 저주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정현대비는 경빈 박씨를 의심했다. 경빈이 새로 들어온 문정왕후를 질투한 것은 물론 동궁을 제치고 자신의 아들 복성군을 세자로 만들려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4월14일, 정현대비는 경빈 박씨를 주모자로 지목하는 글을 대신들에게 내렸다. 하지만 정말로 경빈 박씨가 주모자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문정왕후의 자작극일 수 있었고,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음모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정현대비는 중전 문정왕후와 세자에게 혹시라도 문제를 일으키지나 않을까하는 염려로 엉뚱한 야망을 품고 있는 경빈 박씨를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범인으로 의심받던 경빈박씨(敬嬪朴氏)의 시녀와 사위인 홍려(洪礪)의 종들이 심문을 받고 매를 맞아 죽었다. 또한 형벌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한 자도 있었다. 이 때문에 경빈 박씨와 그녀의 아들 복성군(福城君)은 함께 서인(庶人)이 되어 쫓겨나고 말았다. 뒤이어 경빈 박씨가 낳은 두 옹주를 폐서인(廢庶人)하여 내쫓았다. 다시 동궁의 인형을 만들어서 나무패를 걸고 거기에 망측스런 글을 쓴 일이 다시 생기자, 서인이 된 경빈 박씨와 복성군은 결국 사사(賜死)되고 말았다. 이를 ‘작서(灼鼠)의 변(變)’ 이라고 한다.
좌의정 심정도 경빈 박씨와 결탁하였다 하여 사사(賜死)되었다. 그 뒤 1532년 이종익(李宗翼)의 상소에 의해 진범이 김안로(金安老)의 아들 희(禧)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김안로는 심정과 유자광(柳子光) 등에게 원한을 품어오던 중 아들 희를 시켜 작서의 변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이 사건은 아들이 부마로 있음을 계기로 정권을 농단하다가 권세를 잃게 되자 권세를 만회하고자 한 김안로의 음모로, 당시 정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경빈과 복성군은 신원되었다. 하지만 이미 백골이 되어버렸으니 이런 안타까운 일이.........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경빈 박씨를 두고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경빈은 성품이 공손하지도 않고 만족할 줄도 몰라서 사랑을 얻으려는 술책에만 힘썼다. 은총을 믿고 멋대로 방자하게 구는 가 하면, 분수에 넘친 마음을 품고 뇌물을 널리 긁어 들였으므로 간청(干請)하는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그러고도 전혀 경계할 줄을 모르다가 이런 화를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시론(時論)은 박씨만의 죄가 아니라 역시 임금이 지나치게 총애한 소치라고 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