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종의 즉위 2편
■ 성종의 즉위 2편
예종에게는 비록 어리지만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다. 아니면, 세조의 장손인 월산대군(의경세자의 큰아들)이 다음 후보여야 한다. 그러나 정희황후는 죽은 의경세자의 둘째아들인 열세 살의 자을산군을 왕으로 지명한다. 열여섯 살의 건장한 월산대군을 제치고 말이다. 이에 대해 정희왕후는 제안대군은 아직 너무 어리고(4살) 월산대군은 병약해서 안 된다는 이유를 들었는데, 월산대군이 병약하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또한, 정희왕후는 세조가 자을산군을 예뻐했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지만, 기록에 의하면 세조가 월산대군을 더 예뻐한 정황들이 많이 나온다. 정희황후도 이런 점이 찔렸는지 명나라에 자을산군 왕위 계승을 요구하는 글을 보낼 때 예종의 유언을 위조하기까지 했다. 자산군이 성종으로 즉위하면서 한명회의 둘째 딸은 공혜왕후가 되었으나 자식은 없었다.
곧바로 수렴청정을 시작한 정희왕대비가 버티고 있고, 훈신 세력의 우두머리인 한명회가 성종 뒤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이상, 예종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이나 성종의 왕위계승에 대한 잡음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특히 정희왕대비와 인수대비는 구공신 훈구세력과는 계유정란 때부터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특히 겹사돈인 한명회하고는 한 집안 식구나 마찬가지였다.
왕으로 즉위한 성종의 나이가 13세에 불과해, 성년이 될 때까지 할머니인 정희왕대비가 수렴청정을 맡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당시 13살인 자을산군보다 네 살에 불과한 제안대군을 왕위에 올리면 정희왕후의 수렴청정기간도 훨씬 길어지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은 의아한 점이다. 정희왕후는 수렴첨정 기간에 자신들을 견제하던 신공신이자 종친세력의 핵심 인물인 귀성군 준을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하여 유배 보냄으로써 한명회와 훈신세력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덧붙여 세조가 허용했던 종친들의 정치참여도 법으로 금지시켰다. 왕위를 빼앗긴 제안대군과 월산대군도 죽을 때까지 몸을 낮추고 정치를 멀리하면서, 풍류나 즐기면서 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유유자적한 삶을 살면서 천수(天壽)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종은 할머니와 어머니의 치마폭에 쌓여 꼼짝 못할 만큼 어리지도 어리석지도 않았다. 성종은 곧 성년이 되고 직접통치를 시작하면서 한명회를 제외한 대부분의 훈구대신들이 사망하자, 남은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진세력인 사림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성종은 신숙주나 한명회와 같은 훈구파의 빈자리에 김종직 등의 사림파를 등용했고 그렇게 새 시대를 열었다. 훈구파에 맞선 사림파의 대립이 본격화되면서 역사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됨을 예고한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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