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종의 즉위 1편
■ 성종의 즉위 1편
어느 왕조이던 성종(成宗)이라는 묘호(廟號)는 큰 의미가 있다. 건국 초 새 왕조의 불안을 잠재우고 정치적 제도적으로 안정을 찾고, 새 왕조를 든든한 반석 위에 올려 완성시켰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성종시대는 조선이 개국하고 80년 정도 지난 시점으로, 조선 역사상 보기 드문 태평성대와 평화가 찾아 왔다. 외침도 없고, 큰 내란도 없었다. 성종 중반부터 연산군 초기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고 백성들도 살기 좋은 시대였다고 한다.
조선 9대 왕 성종은 1457년(세조3년) 세조의 큰아들 덕종(의경세자)과 한확의 딸 소혜왕후(후에 인수대비)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혈(娎)이며, 1461년(세조7년) 자산군(者山君)에 봉해졌다. 사실 성종은 왕위계승 서열에서는 애당초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성종의 친부(親父)인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가 세자 시절 일찍 죽지 않고 왕위에 올랐다면, 성종은 왕위계승 서열이 2위였다. 그러나 의경세자가 갑자기 죽고, 세조의 차남인 의경세자의 동생이 예종으로 즉위하면서 성종은 왕위로부터 더 멀어져 갔다.
하지만, 예종은 왕위에 오른 지 1년 2개월 만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때 예종의 나이 20세. 예종은 훈신세력과 종친세력을 잘 저울질하여 자신에게 유리하게 써 먹었어야 했지만, 아직 어리고 정치적 경험이 미숙한 탓인지, 이 두 세력을 모두 적으로 만들고 말았다. 예종은 친모인 정희왕후(세조의 부인)마저 적으로 돌렸다는 설이 있다.
정희왕후는 예종에게 정치적인 부탁을 여러 번 했는데, 예종은 그때마다 꼬박꼬박 정희왕후의 부탁이 있었음을 신하들에게 밝혔다. 신하들 입장에서는 대비가 자주 부당하게 정사에 관여한다고 비난할 일이었다. 이런 일들이 공론화 되면서 정희왕후는 공개적으로 거듭 망신을 당하면서 아들이 곱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위와 같은 모든 상황은 당시 예종독살설이 나올 만 한 근거가 되었다. 예종이 구공신을 공격하고 정희왕후를 무시하자 이들이 합작하여 예종을 제거했을 수도 있다. 실록에도 예종은 죽기 직전 까지 특별히 아팠다는 언급이 없다. 말 그대로 급서(急逝)였다. 예종의 시신을 염습할 때 시신이 변색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는 겨울이었으니 변색되었다는 것은 약물 중독을 뜻한다. 그런데 시신의 변색에 관해 정희왕후는 예종이 치료를 권할 때 잘 받지 않아서라고 둘러대며 넘어 가 버리고 만다. 예종 독살설은 조선 왕의 수많은 독살설과 마찬 가지로 단지 추론일 뿐이다.
예종의 급서에도 불구하고 자리에 모인 공신들과 정희왕후는 태연했다고 한다. 특히 예종의 친모인 정희왕후는 자기 아들이 죽었는데도 누구보다도 침착하였으며, 바로 그 날 임금으로 누굴 정할 지를 물었다. 정희황후는 예종 다음 임금으로 뜬금없이 성종(자을산군)을 추대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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