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일 화요일

압구정狎鷗亭 2편

■ 압구정狎鷗亭 2편

■ 압구정(狎鷗亭) 2편

1476년 성종의 나이 스무 살이 되자, 7년간 수렴청정을 해오던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성종에게 친정을 시키겠다는 언문교지를 내렸다. 정희대비가 물러나겠다고 하자 훈신 세력들은 이를 극구 만류했다. 자신들을 비호하던 정희대비가 물러나고 성종이 친정을 하면 입지가 줄어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성종은 정희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겠다고 하자 몇 번 만류하다가 곧 그 뜻을 받아들였다. 성종 입장에서는 성년이 된 자신을 여전히 믿지 못하는 장인에 대해 불만이 쌓였을 것이다. 장인의 힘으로 왕위에 오른 성종이지만, 그리 만만한 왕이 아니었다. 성종에게 있어서 장인 한명회는 최고의 정치 후원자이면서, 새 시대로 나가는 데 있어서 최대의 걸림돌이 되는 존재였다.

친정을 시작한 성종은 훈신 세력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사실 세조, 예종, 성종을 거치면서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한 훈구파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쇠퇴하고 있었다. 성종 즉위 초부터 친정이 시작된 시점에 이르러서는 구치관, 한백륜, 신숙주, 홍윤성, 정인지 등 대표적 훈신들이 차례로 세상을 떴다. 영향력 있는 훈신은 한명회와 정창손 정도만 남아 있었다. 성종은 첫 번째 부인인 공혜왕후의 아버지이자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한명회와의 관계 청산에 들어갔다. 그 빌미는 한명회가 결국 제공한 셈이다.

1481년(성종12년) 6월의 일이다. 한명회는 성종에게 중국 사신과 함께 자신의 개인 정자인 압구정에서 연회를 열고자 하는데 장소가 좁으니 왕실에서 사용하는 용봉(龍鳳)이 새겨진 천막을 칠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성종은 장소가 좁으면 왕실 소유의 정자인 제천정에서 잔치를 열고 압구정에는 장막을 치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한명회는 심기가 불편해져서 부인의 병을 핑계로 잔치가 열리는 제천정에는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 이 말이 전해지자 대간들이 한명회를 불경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탄핵했다. 이에 성종은 희우정과 제천정을 제외한 모든 정자를 없애겠다는 강경한 선언을 했다.

한명회에 대한 성종의 의중을 알아차린 승지와 대간들은 연이어 한명회를 비난했다. 성종은 잘못을 꾸짖는 선에서 일을 매듭지으려 했지만 반발이 계속되자, 결국 한명회의 국문을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명회는 추락하고 말았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한명회는 압구정 관련 일을 해명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결국 이 일로 한명회는 파직되었다. 이로써 계유정난 때 공신이 되어 세 왕에 걸쳐 최고의 권력을 누리던 한명회의 시대도 끝이 났다. 그것은 훈구파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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