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일 화요일

압구정狎鷗亭 1편

■ 압구정狎鷗亭 1편

■ 압구정(狎鷗亭) 1편

서울의 ‘압구정동’이라는 동명(洞名)은 이곳에 조선 세조 때의 권신 한명회(韓明澮)가 지은 ‘압구정(狎鷗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 ‘압구정’은 한명회의 호로 일찍이 중국 송(宋)의 재상이었던 한기(韓琦)가 만년에 정계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갈매기와 친하게 지내면서 머물던 그의 서재 이름을 압구정(狎鷗亭)이라 했던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

지금은 1970년대 이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서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한강물이 발 아래로 유유히 흐르고 강 건너 북쪽으로 도성의 여러 산과 저 멀리 북한산 연봉과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이 바라보인다. 동남서쪽으로 강 건너 살곶이벌과 그 뒤의 아차산 남한산 청계산 관악산 등이 두루 바라다 보이는 뛰어난 경관을 가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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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치가 이토록 빼어난 곳이니 역대 권문세가들이 항상 이곳을 탐내어 별장을 짓고자 했다. 압구정을 처음 지은 사람은 한명회였다. 그는 수양대군의 심복이 되어 김종서와 안평대군 등 조정대신과 왕자들을 죽이고,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어린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게 한 장본인이다. 성종이 왕으로 즉위한 후 한명회의 위세는 더욱 커졌다. 권모술수의 달인 한명회(韓明澮)가 세조의 총애를 바탕으로 성종 대까지 꾸준히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두 딸을 예종과 성종에게 각각 시집보냄으로써 왕실의 장인으로 오래도록 굳건한 지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13세의 사위 잘산군, 즉 성종(成宗)을 왕위에 올리는 데 정치력을 발휘함으로써 세조 때부터 승승장구해 온 그의 권력에는 ‘왕의 장인’이라는 프리미엄이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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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권력을 구가하던 한명회는 1476년(성종 7년) 만년(晩年)에 한강가에 압구정(鴨鷗亭)이란 정자를 짓고, 명나라 사신인 문인 예겸에게 압구정, 즉 갈매기와 친하게 지내는 정자라는 뜻의 이름을 받는다. 갈매기를 벗하며 유유자적하게 여생을 마무리 짓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기도 한 압구정은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한명회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공간이기도 했다. 당시 한강 주변에는 왕실 소유의 희우정(喜雨亭)이나 제천정(濟川亭) 등 만이 있었다. 최고 조망을 가진 곳에 신하의 신분으로 정자를 건립한 것 자체만으로도 한명회의 위상이 어떠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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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이 완성되던 날, 성종은 이를 기려 직접 시를 지어 내릴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이듬해 한명회를 견제한 젊은 관료들의 반발로 현판에 걸린 성종의 시는 철거됐다. 하지만 압구정은 한명회의 화려했던 정치 인생에 종지부를 찍는 부메랑으로 날아왔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