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신 2편
■ 이순신 2편
상당히 다른 길을 걷게 되는 두 사람이 어린 시절 어떻게 어울렸는지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훗날 유성룡은 “신의 집은 이순신과 같은 동네였기 때문에 그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다.”고 선조(宣祖)에게 아뢸 정도로 친밀했던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그런 기억에 따라 유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어린 시절의 이순신을 인상 깊게 회고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영특하고 활달했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동네에서 전쟁놀이를 했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해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군문(軍門)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려고 했다. 말 타고 활쏘기를 잘 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
인생의 방향도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유년 시절에만 국한된 관찰은 아니라고 추정되는데, 유성룡이 기억하는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무인의 기개가 넘쳤던 것으로 보인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은 그 눈을 쏘려고 했다’는 대목은 어린 아이로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무례하거나 거칠다고도 보인다. 세 살 차이인 유성룡과 이순신은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국난(國難)을 통해 각각 문무(文武)에서 나라를 구원하는데 결정적인 공로를 세웠다. 유성룡의 혜안(慧眼:안목과 식견)은 이순신을 적극 천거하고 옹호하여 나라를 위험에서 건질 수 있었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이순신은 서울을 떠나 외가가 있는 충청남도 아산(牙山)으로 이주했다. 아산은 지금 그를 기리는 대표적 사당인 현충사(顯忠祠)와 묘소가 있어 그와 가장 연고가 깊은 지역으로 평가된다. 그렇게 된 까닭은 조선 중기까지도 널리 시행되던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영향 때문이었다. 남자가 결혼한 뒤 처가에서 상당 기간 거주하는 이 풍습은 자연히 부인과 그의 집안인 처가(외가)의 위상을 높였다. 가장 익숙한 사례는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상징하는 대표적 지역이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친정이 있던 강릉(江陵)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그 뒤 1565년(명종 20년) 이순신은 20세의 나이로 상주(尙州) 방씨(方氏)와 혼인했다. 장인은 보성(寶城)군수를 지낸 방진(方辰)이었는데, 과거 급제 기록이 없고 군수라는 관직으로 미루어 그리 뛰어난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순신은 방씨와의 사이에서 이회(李薈), 이울(李蔚), 이면(李葂)의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어릴 때부터 무인의 자질을 보였지만, 이순신은 문과 응시를 준비해 왔다. 10세 전후부터 공부를 시작했다고 보면 그는 10년 정도 문학을 수업한 것인데, 무장(武將)으로는 드물게 난중일기(亂中日記)와 여러 유명한 시편을 남긴 것을 보면 이런 학업이 뛰어난 문학적 능력을 쌓은 데 중요한 자산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혼인 1년 뒤 인생의 방향을 크게 바꾸어 본격적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