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신 3편
■ 이순신 3편
이순신은 5년 뒤인 1572년(선조 5년) 8월 훈련원 별과(別科)에 처음 응시했다. 그러나 시험을 치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넘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물론 낙방했지만, 다시 일어나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다친 다리를 싸매고 과정을 마친 것은 널리 알려진 일화이다. 무장으로서 이순신의 공식적인 경력은 그로부터 4년 뒤에 시작되었다. 그는 1576년(선조 9년) 2월 식년무과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그의 나이 31세로 임진왜란을 16년 앞둔 시점이었다. 그의 일생 전체가 그러했지만, 이때부터 순탄치 않은 관직 생활이 시작되었다.
첫 임지와 직책은 급제한 해 12월 함경도 동구비보(董仇非堡, 현재 함경도 삼수)의 권관(權管: 종9품)이었다. 동구비보는 험준한 변경이었다. 이순신은 그곳에서 햇수로 3년간 근무했다. 그렇게 만기를 채운 뒤 1579년(선조 12년) 2월 서울로 올라와 훈련원 봉사(奉事:종8품)로 배속되었다. 앞서는 거친 환경이 힘들었을 것이지만, 이번에는 사람 때문에 불운을 겪었다. 병조정랑(정5품) 서익(徐益)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고 하자 이순신은 반대했고, 8개월 만에 충청도절도사의 군관으로 좌천된 것이다. 핵심적인 요직인 병조정랑의 뜻을 종8품의 봉사(奉事)가 반대했으니 즉각 불리한 인사조처로 이어진 것은 그리 이례적인 일은 아니었다.
많은 위인들의 이러한 측면이 평범한 사람들과 구분시키는 결정적인 차이지만, 이순신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면모는 원칙을 엄수하는 강직한 행동일 것이다. 이 사건으로 처음 표출된 그의 강직한 자세는 일생 내내 그를 크고 작은 곤경에 빠뜨렸다. 그러나 그런 현실적 불이익은 그의 명성을 조금씩 높였고, 궁극적으로는 지금까지도 그를 존경하는 인물로 남을 수 있게 하는 역사의 보상이 주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으로 비로소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인지, 얼마 뒤 이순신은 파격에 가까운 승진을 하게 되었다. 1580년(선조 13년) 7월 발포(鉢浦:현재 전라남도 고흥군) 수군만호(水軍萬戶:종4품)로 임명된 것이다. 이 인사는 그 파격성도 주목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처음으로 수군에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려고 발포 객사(客舍)의 오동나무를 베어가려고 하자, 이순신이 관청의 물건이라고 제지한 유명한 일화는 이 때의 사건이다. 특별한 인사조치가 뒤따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때의 항명은 큰 문제없이 넘어갔다고 판단되지만, 서익과의 악연이 다시 불거졌다. 서익은 병기(兵器) 상태를 점검하는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으로 발포에 내려왔는데, 이순신이 병기를 제대로 보수하지 않았다고 보고한 것이다. 급속히 승진했던 이순신은 1581년(선조 14년) 5월 두 해 전의 관직인 훈련원 봉사로 다시 강등되었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