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신 4편
■ 이순신 4편
말직(末職)이지만 중앙에서 근무하게 된 그에게 이때 중요한 기회가 찾아올 뻔했다. 국왕을 제외하면 당시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율곡 이이가 이순신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 한 것이다. 그때 이이는 이조판서였다. 유성룡에게서 그런 의사를 전해들은 이순신은 거절했다. 같은 가문(덕수 이씨)이므로 만나도 괜찮겠지만, 그가 인사권을 행사하는 중직(重職)에 있으므로 만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겨우 9세 차이였지만 탁월한 능력과 눈부신 경력으로 조선의 핵심적인 정치가로 자리 잡은 같은 가문의 이조판서가 그때까지도 변방과 중앙을 오가며 부침을 거듭하고 있던 종8품의 말단 무관을 만나보고 싶어 했을 때, 부적절한 개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 하에 거절한 이순신의 태도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게 훈련원에서 2년 넘게 근무한 뒤 이순신은 어떤 까닭에서인지 다시 강등되어 변방으로 배치되었다. 1583년(선조 16년) 10월 건원보(乾原堡:현재 함경북도 경원군) 권관으로 나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발생한 여진족의 침입에서 그는 우두머리를 생포하는 전공을 세워 한 달 만인 11월 훈련원 참군(參軍:정7품)으로 귀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작은 행운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 달 15일 아버지 이정이 아산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불편한 통신 환경 때문에 그 소식은 이듬해 1월에야 이순신에게 전달됐다. 그는 사직(辭職)을 하고 3년 상을 치렀고, 1585년(선조 18년) 1월 사복시 주부(主簿:종6품)로 복직했다. 40세의 나이였다.
그는 유성룡의 천거로 16일 만에 조산보(造山堡:현재 함북 경흥) 만호로 특진해 다시 변방으로 나갔다. 1년 반 뒤인 1587년(선조 20) 8월에는 녹둔도(鹿屯島) 둔전관(屯田官)을 겸임하게 되었다. 녹둔도는 지금 두만강 하구에 있는 섬이다. 복직(復職) 이후 비교적 순조로웠던 그의 관직 생활은 이때 그동안의 부침 중에서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 해 가을 여진족이 침입해 아군 11명이 전사하고 군사와 백성 160여 명이 납치, 말 15필이 약탈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순신은 경흥부사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여진족을 격퇴하고 백성 60여 명을 구출했다. 그전부터 이순신은 그 지역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중앙에 병력 증강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사건의 궁극적인 책임은 중앙 정부에 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은 이 사건을 패전으로 간주했고, 두 사람을 모두 패전의 책임으로 장형(杖刑)에 처한 뒤 ‘백의종군(白衣從軍)’을 명했다. 이순신 생애에서 첫 번째 백의종군이었다.
그러나 명예는 곧 회복할 수 있었다. 1588년(선조 21년) 1월 이일이 2,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을 급습해 가옥 200여 채를 불사르고 380여 명을 죽인 보복전에서 이순신도 참전해 전공을 세움으로써 백의종군에서 벗어난 것이다. 반년 뒤인 윤6월 그는 아산으로 낙향했다.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