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신 임사홍 2편
■ 간신 임사홍 2편
임사홍은 조정 공신들과 외척들이 권력을 남용한다고 비판하였으며, 당대 권신인 한명회, 신숙주 등의 월권행위를 줄기차게 비난하기도 했다. 그래서 조정의 대신들에게 ‘소인배’라는 말을 들을 만큼, 임사홍은 조정 대신들의 공공의 적(敵)으로 몰리게 된다. 하지만, 종친세력인 동시에 성종의 총애로 탄탄대로를 걷던 임사홍도 1478년(성종9년) ‘흙비사건’으로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게 되었다.
‘흙비’는 지금으로 말하면 ‘황사(黃砂)비’를 말하는데, 1478년 4월 초하루에 흙비가 심하게 내리자, 사람들은 이를 하늘의 변괴로 생각하여 모두 두려워하였다. 이에 사간원·사헌부·홍문관에서는 성종에게 이것을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여 근신해야 하며, 당분간 전국에 금주령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도승지 임사홍은 흙비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재앙(災殃)으로 보지 않았고, 국가의 제사가 연이어 있는 이 시점에서 술을 금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주장했다.
이에 삼사(三司: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에서는 임사홍을 맹렬히 성토했다. 그들은 임사홍을 소인(小人)이라 하고, 그가 하는 말은 모두 아첨에서 나온 응큼하고 간사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임사홍의 아버지인 임원준까지 탐오(貪汚: 욕심이 많고 하는 짓이 더러움)한 사람이었음을 언급하며, 가풍이 바르지 못하여 임사홍이 간사한 인간이라고 몰아갔다. 이처럼 대간들이 임사홍을 심하게 탄핵한 이유는, 임사홍이 성종의 총애를 믿고 거만하게 행동하는 것이 꼴 보기 싫었을 뿐만 아니라, 왕실과 혼인으로 맺어진 연줄을 이용하여 권력을 누리고 국정을 농단(壟斷: 이익이나 권리를 독차지함)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성종은 처음에는 대간들의 탄핵을 제지하며 임사홍을 감싸주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대간들의 탄핵이 점점 격화되자, 성종도 대간들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때 효령대군의 손녀인 임사홍의 부인이 남편의 무고함을 상소했다. 그리고 첫째 며느리인 현숙공주(당시에는 정숙공주라 함)는 아버지 예종이 돌아가신 후로 임사홍을 친아버지와 같이 의지하고 있다며 울면서 읍소(泣訴)했다. 이처럼 왕실의 여인들까지 나서서 만류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임사홍은 의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임사홍의 당인(黨人)이었던 유자광(柳子光)도 동래로 유배를 갔다. 그 뒤, 유자광과 임사홍은 성종이 죽을 때까지 숨죽이며 복수의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성종 사후 연산군이 즉위하자, 마침내 그들은 연산군의 비위를 맞추면서 재기할 수 있었고, 각각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라는 피비린내 나는 사화를 주도하는 주역이 되었다.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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