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신 임사홍 3편
■ 간신 임사홍 3편
연산군이 즉위하자, 임사홍은 막강한 권력자가 되어 화려하게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 그가 정계로 돌아올 수 있도록 영향력을 발휘한 사람은 아들 임숭재와 며느리 휘숙옹주(성종의 딸)였다. 그 이유는 휘숙옹주가 많은 이복 여동생 중에서도 특히 연산군이 아끼는 여동생이었고, 그녀의 남편인 임숭재도 연산군은 특별하게 생각했다. 아들과 며느리 덕분으로 임사홍은 다시 권력을 잡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정계로 돌아온 임사홍은 자신을 쫓아냈던 이들을 향한 피비린내 나는 복수를 시작하였다. 성종이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 문제를 100년이 지날 때까지는 아무도 논하지 말라’는 유명(遺命)을 남겼지만, 임사홍은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 문제를 일부러 끄집어내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이다. 임사홍의 폭로로 시작된 사화가 바로 1504년(연산군10년)에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다. 갑자사화는 임사홍이 자신의 정적(政敵)을 제거하는 수단으로도 활용하였기 때문에 사림파뿐만 아니라 훈구파 내에서도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자신의 생모가 참소(讒訴) 당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연산군의 분노는 폭주하기 시작했고, 그 사건에 연루된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극형에 처하거나 이미 죽은 자들은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고(부관참시:剖棺斬屍), 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려 보냈다(쇄골표풍:碎骨飄風). 더 나아가 시체를 강물에 던져 물고기 밥이 되게 하거나, 그 자제나 사위들까지 죽이거나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고 부인이나 딸은 종으로 삼았다. 천하의 한명회도 부관참시를 피하지 못할 정도로 연산군의 광기는 극에 달하였다.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이러한 잔인한 일들이 모두 임사홍이 사적인 감정을 품고 임금을 유도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평가했다.
임사홍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갑자년 이후로도 자기를 비난한 자에게 일일이 앙갚음하고 이미 죽은 사람까지도 모두 참시(斬屍)하는데 열을 올렸다. 당시에 사람들이 임사홍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온 조정이 그를 승냥이나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여 비록 두 신씨(愼氏: 당시 실세였던 왕비 신씨의 오빠들)들도 조심스럽게 섬겼다. 연산군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곧 그에게 쪽지로 통지하고, 임사홍은 바로 들어가 시행하여 명령이 내려지니, 그가 부도(不道)한 것을 유도한 일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고 연산군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국역조선왕조실록 중종 1년 병인(1506) 9월2일 기사에 이런 내용이 있다.
『연산군 시대의 간신 임사홍(任士洪)과 아들 광재(光載:공주의 남편), 숭재(崇載:옹주의 남편)등을 사람들이 미워했는데, 그때 사람이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어 읊었다.
小任崇載大任洪(작은 소인 숭재, 큰 소인 사홍이여!)
千古姦兇是最雄(천고에 으뜸가는 간흉이구나!)
天道好還應有報(천도는 돌고 돌아 보복이 있으리니, 알리라)
從知汝骨亦飄風(네 뼈 또한 바람에 날려질 것을.)』
-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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