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밀 프로젝트 훈민정음 2편
■ 비밀 프로젝트 훈민정음 2편
세종 28년에는 임금이 대간(臺諫:사간원, 사헌부)의 죄를 언문으로 써서 의금부와 승정원에 보이기도 한다. 관리를 뽑는 시험에 훈민정음도 치르게 했다. 이는 새로 만든 문자를 널리 보급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연산군은 훈민정음을 박해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연산군은 즉위 초에는 국정을 잘 운영하다가 생모의 죽음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을 안 뒤 파행적 행동을 하게 된다. 이러한 연산군의 잘못을 훈민정음으로 기록한 투서가 발견되었다. 이 투서 사건으로 연산군 10년 7월 20일 언문을 배우거나 쓰지 못하게 했고, 이틀 후에는 언문으로 해석을 단 책을 불사르고 한어(漢語)를 언문으로 번역하는 것을 금했다. 개인적 감정이 언문에 대한 박해로 번진 것이다. 그런데 같은 해 12월 10일에는 병조 정랑 조계형에 명하여 언문으로 역서(曆書)를 번역하도록 했다. 공식적 일까지 언문 사용을 금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훈민정음은 중간 관리뿐만 아니라 임금이나 왕비, 왕대비 등도 사용했다. 숙종 15년 4월 24일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이 때 임금이 언문으로 된 유지(有旨)를 승정원에 내려 문자(文字)로 번역해서 《일기(日記)》에 추록하게 하였다. 도승지 유명견이 아뢰기를, "언문 유지를 승정원에 내린 것은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사람들의 이목을 놀라게 할 뿐만이 아니라 뒷날 폐단이 있게 됩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언문 유지를 삭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언문으로 된 유지를 썼다가 신하들의 반대로 언문 유지를 삭제한 것이다.
선조는 직접 언문으로 백성들에게 교서를 내렸는데, 이 교서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왜군 포로로 잡힌 백성을 회유하기 위하여 쓴 것이다. 부득이 왜군에게 잡혀간 백성들의 죄는 묻지 않음은 물론, 왜군을 잡아오거나 왜군의 동태를 자세히 알아서 나오거나 포로가 된 우리 동포를 많이 데리고 나오면 누구든지 벼슬을 시키겠다는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인현왕후가 숙희공주에게 언문으로 위로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정조 18년 4월 10일에는 왕대비가 모든 신하들에게 언문 전교를 내리기도 한다. 광해군 때에 허균은 당시의 사회 문제를 소재로 훈민정음으로 《홍길동전》을 썼다. 이와 같이 훈민정음은 백성을 염두에 두고 만든 문자이기는 하지만, 창제 초기에는 중간 관리나 하급 관리 등이 사용하기도 했고, 임금이나 왕비· 왕대비 등의 계층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