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종의 여인들-공혜왕후 2편
■ 성종의 여인들-공혜왕후 2편
왕비가 된 후에도 정희왕후·소혜왕후·안순왕후 세 대비를 극진하게 받들어 모시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인수대비(소혜왕후)는 며느리들에게 무척 엄격한 시어머니였는데, 한씨에게 중국의 현모양처들에 관한 이야기인 《열녀전》을 읽게 하는 등 유교 윤리에 따라 철저히 교육했다. 착한 품성의 소유자이면서 효심도 지극한 그녀였지만 성종이 어린 후궁을 가까이하는 것을 보는 것에는 가슴앓이를 많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종실록>에는 『후궁을 대접함에 있어서는 너그럽고 대범하여 중도(中道)에 맞으셨으며…(중략) 왕후께서는 장차 후궁을 뽑을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 의복을 극히 정밀하게 장만해두었다가 들어오기를 기다려서 내리시고, 복식과 완구를 끊임없이 내려주면서도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으셨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후궁에 대한 투기가 없음은 물론이고, 그녀들에게 최대한 은혜를 베풀어 주었음을 말해준다. 공혜왕후 승하 후에 성종의 계비가 된 폐비 윤씨가 후궁에 대한 투기가 대단했던 것과는 대비되는 상황이다.
착한 품성으로 남편을 잘 내조하고 대비들에 대한 효심도 대단했던 공혜왕후의 생은 그리 길지 않았다. 1473년 7월 병으로 친정인 한명회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고, 성종도 하루가 멀다 하고 이곳에 들를 정도로 왕비에게 지극한 정성을 다했다. 그녀는 병이 회복돼 다시 궁궐로 돌아왔으나 병이 다시 깊어져, 다음해 3월에는 본인의 희망으로 구현전(求賢殿)으로 거처를 옮겼다. 구현전에는 성종과 대비들이 날마다 거동해 왕비의 쾌차를 빌었지만, 공혜왕후는 1474년 4월15일 1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최후의 순간에도 왕실의 어른들과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함을 한탄했다는 이러한 기록도 전한다. 『왕후께서 훙서(薨逝)하기에 임박하여, 한명회와 부인이 여러 날 먹지 않는 것을 보고 명하여 밥을 먹게 하고, 더불어 결별하여 이르기를, ‘죽고 사는 데에는 천명이 있으니 영영 삼전(三殿)을 여의고 끝내 효도를 다하지 못하여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 하시고 드디어 돌아가셨다.』
계유정난으로 단종을 숙청하며 집권한 한명회는 조선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두 딸을 왕비로 만들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지만, 두 딸(셋째 장순왕후, 넷째 공혜왕후)이 모두 스무살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하게 되는 비운을 겪게 된 것이다.
성종은 유순하게 윗사람을 잘 섬김을 공(恭)이라 하고, 너그럽고 부드러우며 인자함을 혜(惠)라 하여 공혜왕후(恭惠王后)라는 시호를 올렸다. 공혜왕후의 능(陵)은 경기도 파주에 이미 조성돼 있던 친정언니 장순왕후의 공릉(恭陵) 동쪽에 조성되었고, 순릉(順陵)이라 했다. 세자빈으로 세상을 떠난 장순왕후의 공릉과는 달리 왕비의 능이므로, 전체적인 구조는 공릉과 같지만 순릉은 공릉에 비해서 석물이 많이 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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