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6일 토요일

오명汚名을 남긴 남곤 2편

■ 오명汚名을 남긴 남곤 2편

■ 오명(汚名)을 남긴 남곤 2편

“처음에 남곤이 조광조 등에게 교류를 청했으나 조광조 등이 허락하지 않자 남곤은 유감을 품고서 조광조 등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나뭇잎의 감즙(甘汁)을 갉아 먹는 벌레를 잡아 모으고 꿀로 나뭇잎에다 ‘주초위왕’ 네 글자를 많이 쓰고서 벌레를 놔 갉아 먹게 했는데 마치 자연적으로 생긴 것 같이 만들었다. 남곤의 집이 백악산 아래 경복궁 뒤에 있었는데 자기 집에서 벌레가 갉아 먹은 나뭇잎을 물에 띄워 대궐 안의 어구(御溝)에 흘려보내어 중종이 보고 매우 놀라게 하고서 고변(告變)해 화를 조성했다.”

어찌 됐건 남곤은 기묘사화를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됐다. 문장에 능해 정승감이 되리라는 예상은 맞았지만, 문장력으로 얻은 정승이 아닌 정치 공작으로 얻은 지위였다. 중종 22년 남곤이 사망하자 중종은 깊은 애도를 표시하며, 조참(朝參)·경연(經筵)·열무(閱武) 등의 일을 정지하고, 소찬(素饌·고기나 생선이 들어 있지 않은 반찬)을 올리도록 지시했다.

이처럼 중종을 도와 역모를 차단하고 그 공으로 최고의 지위에 올랐지만 역사는 남곤을 ‘간신’으로 규정하면서, 그와 같은 인물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아야 됨을 경계하고 있다.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남곤이 젊어서는 글로 세상에 이름이 났지만 출세에 급해 역모를 조장했다”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남곤도 자신이 행한 죄를 이미 파악하고 있던 정황도 나타난다. 남곤은 옥사를 주도한 후에 친척과 후배들에게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을 여러 차례 던졌다. “응당 소인이 됨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라는 답을 듣고는 하인을 시켜 평생 쓴 초고를 모두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중종 시대 제일의 문장가였지만 그의 작품이 대부분 사라져버린 이유다.

최소한의 명예라도 지키기 위해서일까? 죽기 직전 남곤은 자제들에게 “내가 허명(虛名)으로 세상을 속였으니 너희들은 부디 이 글을 전파시켜 나의 허물을 무겁게 하지 말라”고 했다. 자신이 죽은 뒤에 비단으로 염습(殮襲)하지 말 것과 평생 마음과 행실이 어긋났으니 부디 비석을 세우지 말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남곤은 죽은 뒤 사림파가 다시 권력을 잡고 조광조가 신원 복권되는 과정에서 관작을 모두 추탈(追奪)당했다.

남곤은 당대 제일의 문장가였지만, 그런 장점은 모두 사라진 채 역사는 그를 간신의 전형으로 기억하고 있다. 권력 때문에 자신의 명성과 원고까지 잃어버린 남곤의 사례는 현 정치사에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