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성룡과 징비록懲毖錄 2편
■ 류성룡과 징비록(懲毖錄) 2편
선조가 1567년 왕위에 오르면서 유성룡은 선조 재임 기간 동안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 등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며 선조의 신임을 받았다. 1589년 이조판서 재임 시절 정여립 역모 사건이 일어나 그 여파로 동인(東人)내에서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당파가 분리되었는데, 이때 북인과 맞서는 남인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붕당의 대립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1590년 5월 우의정을 거쳐, 1591년 좌의정과 이조판서를 겸한 것으로 보아 선조의 신망이 두터웠던 듯하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발발(勃發) 1년 2개월 전 정읍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권율을 의주목사로 천거한 것만 보아도,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도 탁월한 것 같다. 류성룡의 결단과 위기 때마다 그의 지혜로움과 리더십으로 인해 어려운 전란을 극복할 수 있었다. 류성룡의 적극적인 후원과 지지 덕분에 해상에서는 이순신이 불리한 전세를 이길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여 왜구를 해상에서 물리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은 평양성 사수를 포기하고 피난하려는 선조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해놓고 또 신의주까지 간다면 다시는 서울을 수복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선조는 영변을 향해 길을 떠났고, 류성룡은 순찰사 이원익 등과 함께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기 위해 평양에 머물렀다. 이후 류성룡은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평양성 탈환을 계획했다. 1593년 1월 평양성을 탈환한 후 이여송이 왜군과의 강화(講和) 협상에 나서자, 이에 반대하고 왜군에 대한 총공세를 주장했다. 1594년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선조에게 ‘전쟁에서서 마땅히 지켜야 할 10조목’ 등을 올리면서 전쟁대비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난 후에도 류성룡은 왕명으로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을 순시하면서 전쟁 최전방에서 활약했다. 서애집(西厓集)에는 이런 류성룡의 활약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하지만, 참으로 답답하게도 선조와 대신들은 전란 중임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누군가의 공이 커지는 것을 질투해서 모함하는 일 들이 일어난다. 의병을 일으켰던 합천의 곽재우나 이순신 장군이 대표적인 예이다. 류성룡까지도 사사로운 이유를 들어 파직시키려 한 선조를 보면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류성룡같은 재상과 이순신같은 장군이 있었기에 무능하고 시기심 많은 조정 대신들이 득실거리던 조선이 왜군에게 망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파직 당한 후 류성룡은 1599년 2월 고향인 안동 하회로 돌아왔고, 형 유운룡과 옥연정사에서 뱃놀이를 하는 등 여유자작한 생활을 하면서 징비록 집필에 들어갔다. 1604년 7월에는 임진왜란 때의 공을 인정받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녹훈됐지만, 그럼에도 그는 주로 집필활동에만 전념하다가 1607년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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