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계천을 조성한 태종 2편
■ 청계천을 조성한 태종 2편
하지만 큰비가 내리면 한양이 물바다가 되는 상황은 계속됐다. 1407년 5월 27일에는 큰비가 내려 천거(川渠·개천과 도랑)가 모두 넘쳤으며, 1409년 5월 8일에는 큰비가 내려 교량이 모두 파괴되고 두 명의 익사자도 발생했다. 1410년 7월 17일에는 도성에 물이 넘쳐서 종루(鍾樓) 동쪽에서부터 흥인문(興仁門)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통행하지 못할 정도였다.
홍수 피해가 심각해지자 태종은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거듭 고민한 끝에 태종은 대대적인 공사를 감행하기로 결심하고 이런 자신의 의지를 신하들에게 공표했다. 1411년 윤 12월 1일 일이다.
"해마다 장맛비에 시내가 불어나 물이 넘쳐 민가가 침몰되니 밤낮으로 근심이 돼 개천 길을 열고자 한 지가 오래다. 지금 개천을 파는 일이 백성에게 폐해가 없겠는가? 혹 자손 대에 이르게 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개천 공사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이것이 백성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 발언이었다. 태종의 대표적 참모인 하륜은 이렇게 답한다.
"백성을 적당한 시기에 부리는 것은 예전부터 내려져 왔던 도(道)입니다. 창고를 열어 양식을 주고 밤에는 공사를 쉬게 해 피로해서 백성들이 병이 나지 않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백성들에게 충분히 보상을 하면 공사를 해도 괜찮다는 것이 하륜의 생각이었다. 다른 신하들도 태종의 계획에 적극 찬성했다.
1412년(태종 12년) 1월 10일 태종은 마침내 개천도감(開川都監)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동원해 공사에 들어갔다. 태종은 개천 공사를 하면서, 파루(罷漏·통행금지 해제, 새벽 4시에 종을 33번 침) 후에 공사를 시작하고, 인정(人定·통행금지, 밤 10시에 종을 28번 침)이 되면 공사를 중지할 것을 지시했다. 이를 어길 시에는 감독관을 문책하겠다고 경고했다.
이 외에도 태종은 전의감(典醫監)·혜민서(惠民署)·제생원(濟生院) 등의 관청으로 하여금 미리 약을 만들 것을 지시했다. 또 천막을 치게 해 만약에 병이 난 자가 있으면, 치료를 아끼지 않을 것을 주문했다. 개천 공사에 징발돼 온 지방 일꾼들에게 무리하게 작업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건강과 구호에 만전을 기했던 것이다.
청계천 공사의 핵심은 네 곳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담는 도랑을 준설해 이를 한강으로 흘러가는 중랑천과 연결하는 것이었다. 태종의 의지와 독려 때문인지 최초의 청계천 조성 사업은 비교적 빨리 완공됐다. 1412년 2월 15일 \태종실록\에는 1개월여 만에 공사가 끝난 상황이 기록돼 있다. 공사 완료 후 태종은 "하천을 파는 것이 끝났으니, 내 마음이 곧 편안하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청계천 조성 사업은 한양이라는 도시의 구조에 눈을 뜬 태종의 안목과 실천 의지에서 출발했다. 청계천 공사는 한양의 최대 약점인 홍수 피해에서 벗어나 큰 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다져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됐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