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5일 금요일

청계천을 조성한 태종 1편

■ 청계천을 조성한 태종 1편

■ 청계천을 조성한 태종 1편

1410년 8월 8일, 큰비가 내려 청계천의 흙다리였던 광통교(廣通橋)가 무너졌다. 당시 왕이었던 태종은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돌다리를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여기에 사용한 돌은 정릉에 있는 석물(石物)들로, 이를 모조리 파내 돌다리를 만들게 했다. 정릉은 태조의 계비이자, 태종의 계모인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이다. 원래 덕수궁 근처에 위치했지만, 태종은 왕이 되면서 정릉을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겼다.

신덕왕후는 세자가 될 수 있게 도와 달라는 이방원(태종)의 거듭된 부탁에도 불구하고 정도전과 함께 자신의 아들인 방석(태조의 막내아들)을 세자로 추대했다. 격분한 태종은 ‘1, 2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방석과 정도전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고, 이 과정에서 태종의 신덕왕후에 대한 미움은 극에 달했다. 왕비의 무덤을 장식한 돌을 파내 다리를 만들었다는 것은 신덕왕후에 대한 태종의 증오가 그만큼 컸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태종은 백성들이 오가며 이 다리를 밟는 것을 상상하며 신덕왕후에 대한 통쾌한 복수를 꿈꾸었을 것이다. 이처럼 청계천 광통교는 그냥 다리가 아니다. 조선 초기 왕권 장악을 위한 권력 다툼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서울의 발전과정에서 복개되었던 청계천이 십 수 년 전 복원되었다. 원래 청계천은 자연적으로 생긴 하천이 아니라 6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인공하천이다. 1405년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태종이 의욕적으로 새롭게 만든 인공하천이다.

한양이 조선의 수도로 결정되는 과정에 몇 차례 우여곡절이 있었다. 1392년 7월 조선의 수도는 개성이었지만, 태조 이성계의 강력한 의지로 2년 뒤인 1394년 10월 28일 한양으로 천도(遷都)했다. 정종이 왕위에 오르고 1399년 3월 다시 개성으로 천도하면서 한양은 잠시 수도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1400년 왕위에 오른 태종은 5년 뒤 1405년 11월 한양으로 재천도했다.

한양은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한강이 서해 바다로 빠져나가는 길목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 때문에 수도로 적합했다. 여기에 동서남북으로 낙산, 인왕산, 목멱산(남산), 북악산 등으로 둘러싸인 분지형의 구조는 도시 방어와 백성 관리에 매우 유리했다. 물론 단점도 있었다. 한강이 남산 아래에 있다 보니 도심에 흘러드는 물이 쉽게 빠져나가지 못했다. 도심에 모인 물이 남산에 막혀 바로 한강으로 빠져나가지 못해 비가 많이 오면 한양 도심은 홍수 피해로 큰 몸살을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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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으로 돌아온 태종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는 도심의 홍수 피해를 미리 막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1406년 1월 인공하천을 만드는 개천(開川) 공사를 실시했다(청계천은 조선시대에 줄곧 개천으로 불렸다. 청계천(淸溪川)이라는 말은 일제강점기 이후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한성부(漢城府)에 소속된 600명에게 개천을 파게 한 것이 청계천 공사의 역사적인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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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