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직의 표상 김종직 2편
■ 강직의 표상 김종직 2편
1475년 김종직은 다시 중앙으로 들어와 승문원 참교(參校)를 제수받았지만, 어머니가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선산부사로 갔다. 함양군수, 선산부사 등 영남 지역에서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그의 문하에는 김굉필, 정여창 등 훗날 사림파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몰려들었다. 1479년 어머니 상을 당해 고향인 밀양에 있을 때 인근에 있던 학자 김일손, 조위, 강혼 등도 찾아와 제자가 됐다. 3년상을 마치고는 왕명을 받고 다시 중앙으로 올라왔다. 이후 성종의 깊은 신임 속에 승진을 거듭해 홍문관 응교, 직제학, 부제학, 동부승지, 도승지 등 중앙 요직을 두루 거쳤다.
1485년 55세로 이조참판에 올랐으며, 1486년에는 성종의 명으로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했다. 1489년 형조판서까지 제수받았으나, 병이 깊어져 사직하고 밀양 옛집으로 돌아갔다. 당시 성종은 김종직의 청빈함을 듣고 쌀 70석을 하사하기도 했다. 1492년 62세를 일기로 밀양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렇게 죽은 김종직이 다시 역사 속으로 등장한 것은 1498년 연산군 시대에 발생한 무오사화 때다.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그의 제자인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史草)에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수록된 것이 빌미가 돼 사림파에 대한 대규모 숙청이 이어졌다. ‘조의제문’은 세조대인 1457년 김종직이 쓴 글로 초나라 항우에 의해 죽음을 당한 조카 의제(義帝)를 조문한 글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의제를 조문하는 내용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비판하는 내용으로서 사림파의 이념이 잘 드러난 글이었다. 제자 김일손은 용기 있게 이 글을 사초에 실었지만, 이 사초는 훈구파 대신인 이극돈과 유자광에 의해 연산군에게 즉시 보고됐다.
그렇지 않아도 삼사(三司:사헌부, 사간원, 홍문관)를 통한 사림파의 왕권 견제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연산군은 이를 기회로 사림파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사건의 당사자인 김일손이 처형됨은 물론이고, 스승인 김종직의 문인 영남 사림파 학자 상당수가 화를 입었다. 결국 문건 작성자로 사건의 발단을 제공한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역사적으로 김종직은 사림파의 영수로 널리 기억되게 되었다.
김종직은 사림파가 중시하는 경학에 대한 식견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탁월한 문장력을 인정받았다.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성종 시대 문물과 제도의 정비에 큰 공을 세웠다. ‘점필재집’ 연보에 따르면, “김종직은 기억력이 좋고 글씨를 잘 썼는데, 일찍부터 시에 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날마다 수만 마디의 말을 기억해 약관이 되기도 전에 신동이라 알려졌다. 15세에 이미 시문에 능해 많은 문장을 지었으며, 20세가 되지도 않았을 무렵부터 문장으로 이름을 크게 떨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종직은 영남 사림파의 영수기도 했지만, 15세기 성종 시대의 문물 정비를 완성시킨 강직한 관료였음에 틀림없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