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직의 표상 김종직 1편
■ 강직의 표상 김종직 1편
성종(成宗, 1457~1494년)은 조선전기 문물과 제도를 정비한 업적을 인정받고 있지만, 신숙주, 정인지, 서거정, 정창손 등의 훈구파 대신에 대항해 새로운 정치, 사회 세력을 성장시켜 사화(士禍)라는 피비린내 나는 정쟁(政爭)의 씨앗을 뿌린 점에서 상대적으로 평가절하가 되는 면이 없잖아 있다. 물론 성종이라는 왕의 정치적 리더십이 있었기에 조선 전기 문물과 제도 정비가 가능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사림파라는 신진 세력 적극적인 등용은 성종 시대를 더욱 빛나게 했다. 특히 김종직(金宗直, 1431~1492년)으로 대표되는 영남 사림파의 등장이 주목된다. 사림파의 영수라 불리는 김종직은 누구인가?
김종직은 1498년 무오사화의 단서를 제공하고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한 인물로 기억된다. 조선 전기 훈구파에 대항한 참신한 정치 세력인 사림파의 핵심 인물이고, 후배 사림파를 두루 배출해 조선 전기 영남 사림파가 정치와 사상의 중심을 확보하는데 있어서 큰 역할을 했다.
김종직의 자는 계온(季溫), 호는 점필재, 본관은 선산이다. 김숙자의 아들로 1431년 6월 밀양부 서쪽 대동리에서 3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김숙자는 경상도 선산에 은거한 길재에게 성리학을 배우고, 정몽주, 길재로 이어져 내려온 사림파 성리학을 계승했다. 김종직은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사림파의 학문과 사상을 접할 수 있었다. 1446년 과거에 낙방하는 아픔을 겪었으나, 그때 지은 문장은 모두가 감탄할 정도로 명문이었다고 한다. 결국 1453년 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고, 겨울에는 창녕 조씨와 혼례를 치렀다. 1456년 부친상을 당해 낙향해 여묘살이(무덤 근처에서 여막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키는 일)를 했는데, 이때 인근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459년 문과에 합격한 후 중앙 관직에 진출해 승문원의 저작, 박사 등을 역임했으며, 뛰어난 문장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1464년 8월에는 당시 조정에서 학자들에게 유행처럼 퍼져있던 천문·지리·음양·율려(律呂)·의약·복서(卜筮)·시사(詩史)의 7학(學)을 유자(儒者)로서 가까이해서는 안되는 ‘잡학’이라 하여 비판하다가 파직 당했다. 세조는 “김종직은 경박한 사람이다. 잡학은 나도 뜻을 두는 바인데, 김종직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은가?”라며 관직에서 내쫓았던 것이다. 젊은 관료 시절부터 성리학 이념에 매우 충실했던 강직한 김종직의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다.
김종직이 본격적으로 활약한 시대는 성종 대였다. 성종은 즉위 후 집현전의 예에 의거해 예문관 인원을 늘려 문학하는 선비를 선발해 모두 경연관을 겸하게 했는데, 김종직은 수찬(修撰)에 선발됐다. 1470년 겨울 김종직은 어머니의 봉양을 이유로 지방 관직을 자처했고, 함양군수로 나가게 됐다. 이때 관내 정자에 유자광이 쓴 시를 걸어둔 것을 보고 즉시 명해 불태워버리게 했다. 유자광과 같은 훈구파 간신을 매우 경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훗날 유자광이 앙심을 품고 무오사화 때 김종직에게 복수의 칼을 휘두르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