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의녀 장덕 2편
■ 제주 의녀 장덕 2편
세종은 각 도(道)의 관노 2명씩 뽑아 서울에서 의녀와 함께 의술을 익히게 한 다음, 의술에 능숙한 자를 다시 출신지로 돌려보내 그곳 부녀의 질병을 치료토록 했다. 반면 장덕은 제주에서 여의사로서 명성이 자자해지자 그 소문을 중앙정부가 듣고 의녀로 발탁한 경우였다. 장덕은 의녀제도를 통해 의술을 익혀 국가공인의 의녀(醫女)가 됐던 것이 아니고, 이미 의술이 뛰어난 제주의 여의사로서 중앙정부의 부름을 받고 중앙 의료계에 진출한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성종은 충치로 고통 받은 임금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성종실록》에 보면 『제주도 의녀 장덕(張德)이 치충(齒蟲)을 잘 잡아내고 코와 눈병을 잘 고치니….』라는 말이 전한다. 또한, 우승지(右丞旨) 권경희(權景禧)의 말에 의하면 장덕은 치아의 벌레 제거술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코와 눈에 나는 종기도 잘 제거했다고 한다. 장덕은 중앙정부의 의료계에서 피부과 관련 의술도 행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의술 수준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음도 드러난다. 이후 장덕은 치과 분야에서는 남·여를 불문하고, 대체불가의 명의로서 활동했다.
이렇게 된 데는 제주의 의술이 제주 내에서 계속적으로 도제(徒弟)식으로 전수됐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이는 장덕의 경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장덕이 죽고 난 뒤 치통으로 고통 받고 있던 성종은 장덕을 대신할 의사를 제주에서 찾고자 애썼다. 그것이 주효했는지 제주 출신의 ‘귀금(貴今)’이 성종 23년(1492년)에 혜민서의 의녀로 발탁되었다. 귀금은 장덕에게 의술을 전수받았던 의녀였다. 장덕은 자신도 제주의 여의사 가씨로부터 의술을 전수받았듯이 자신이 갖고 있는 온갖 의술을 그녀의 여종 귀금에게 전수해 줬던 것이다. 귀금은 일곱 살 때부터 배우기 시작해 열여섯이 되어서야 장덕의 의술을 완전히 교습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귀금은 면천과 함께 혜민서의 의녀가 됨으로써 두 번째 제주출신 국가공인 의녀가 되었고, 제주출신 의녀가 치과·안과·이비인후과의 병증 치료에 뛰어났던 전통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귀금은 장덕의 의술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륙의 《청파극담》의 기록을 보면, 장덕이 자신의 의술을 그녀의 여종 가운데 ‘옥매(玉梅)’에게도 전수하여 옥매가 혜민서의 의녀로 들어가게 됐다고 한다. 기록상으로는 장덕의 의술이 마치 귀금과 옥매 두 명의 여종에게 전수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귀금과 옥매는 동일 인물이다. 즉, ‘옥매’는 장덕의 여종으로 지낼 때의 이름이고, 그녀가 장덕의 의술을 교습 받고 면천과 동시에 혜민서의 의녀가 됨에 따라 이름도 ‘귀금’으로 고쳤던 것이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