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산군의 여인들 거창군 부인 신씨 3편
■ 연산군의 여인들 거창군 부인 신씨 3편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연산군 내외는 폐왕(廢王)이 되고 폐비(廢妃)가 되었지만, 욕은 남편과 남편의 애인 장녹수가 다 먹고 거창군부인 신씨는 별다른 비난이나 욕을 먹지 않았다. 죽음을 당할 처지임에도 그녀를 죽이라는 사람들이 없었고, 중종은 그녀를 빈(嬪)의 예로 대하게 하였다. 그녀는 중종의 배려로 1521년(중종 16) 11월에 속공(屬公)한 죄인 안처겸(安處謙)의 집을 받았다. 또 중종반정 이후 신씨 집안의 노비들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녀가 착하고 선한 인품이었기 때문이다. 폐비(廢妃)된 후 중종은 그녀에게 한다.
일반적으로 폐왕이나 폐비가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는 것과 달리 왕비 시절 온화한 성품으로 윗전에는 공손하고 궁인들에게는 자애롭고 덕이 있는 왕비로서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큰 모욕을 당하지도 않고 편안한(?) 삶을 살며 여생을 마칠 수 있었다. 물론 반정공신들 때문에 자식들은 다 죽거나 삶이 험해졌으니 편안한 여생이라고 하는 것은 어폐(語弊)가 있다. 어미의 심정으로는........
우이 계곡 입구에서 방학 사거리 방향으로 따라가면 고개를 넘어서기 전 좌측에 연산군 묘가 위치해 있다. 묘역 입구에는 재실이 자리 잡고 있다. 묘역에는 총 5기의 묘가 있는데, 최상단에 있는 2기가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이다. 연산군과 거창군부인의 묘는 대군의 예에 의해 조성되어 묘표 2기, 혼유석 2기, 상석 2기,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2쌍, 장명등 2기 등을 갖추고 있다. 묘표에는 각각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 ‘거창신씨지묘(居昌愼氏之墓)’라 새겨져 있다. 최하단에는 연산군의 딸 휘순 공주와 사위 구문경(具文璟)의 묘가 있다.
"연산군은 죽음을 앞두고 부인 신씨가 보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 한다. 죽을 때가 되니 제정신이 돌아와 ‘조강지처’가 그리웠나 보다.
",1506년 11월 8일 연산군이 역질로 사망하자 강화도 교동에서 장사를 지냈는데, 1512년(중종 7년) 왕에게 이장(移葬)하기를 청하였으며, 중종은 이를 허락하고 왕자의 예로 정중히 개장하도록 하였다. 1512년 신씨가 연산군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해 달라고 요청한 이유는 이곳이 거창군부인 신씨의 외할아버지인 임영 대군의 땅이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실제 인근에 임영대군파 오산군 묘역이 조성되어 있기도 하다. 연산군이 죽고 난 후 그의 신주를 직접 모신 것으로 추정되며, 중종에게 자기가 죽으면 자신을 연산군 옆에다 묻어달라는 요청을 한다. 1537년(중종 32) 신씨가 사망하자 중종은 연향(宴享)을 미루고 왕후(王后)의 고비(考妣)의 예로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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