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운의 승평부부인 박씨
■ 비운의 승평부부인 박씨
승평부부인 박씨는 월산대군(죽은 의경세자의 큰아들, 성종의 형)의 부인으로 연산군에게는 큰어머니이다. 예종이 어린 아들만을 남기고 갑자기 죽자, 세조의 장손인 남편 월산대군에게 왕이 될 찬스가 오기는 했다. 하지만, 궁중의 실세이던 한명회와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시동생인 성종이 왕이 되는 바람에 왕비가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서른네 살 되던 해에 자녀도 없이 남편인 월산대군과 사별하고 말았다.
젊은 나이에 홀로 된 박씨는 자신의 넷째 여동생이 여덟 살 된 딸을 남겨두고 일찍 세상을 떠나자, 어린 조카딸을 데려다 길렀다. 또한, 연산군 5년(1499년)에는 연산군의 부탁으로 왕의 세 살 된 큰아들도 맡아서 기르기 시작했다. 당시 마흔다섯 살이던 박씨는 비록 자기 자식은 아니지만 여동생의 딸과 연산군의 큰아들을 정성을 다해 키우며 나름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연산군 9년(1503년) 일곱 살이 된 왕자는 세자로 책봉되어 궁궐로 돌아갔다. 박씨는 세 살부터 일곱 살까지 4년을 직접 키운 연산군의 큰아들에게 정이 많이 들어, 아이가 보고 싶을 때마다 궁으로 찾아가곤 했다. 그때마다 연산군은 입궁한 큰어머니 박씨에게 큰아들을 키워준 보답으로 곡식과 일용품을 하사하곤 했다. 어떤 때는 박씨 부인이 궁에서 밤을 새우고 나오는 일도 있다 보니, 연산군과 박씨를 두고 온갖 민망한 소문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게다가 박씨의 남동생 박원종이 초고속으로 승진하게 되자 소문은 더더욱 기승을 부렸다. 박씨는 왜 망칙한 추문들을 들으면서도 계속해서 입궁했을까? 연산군의 큰아들을 기른 정 때문일까? 아니면 점점 광폭해지는 연산군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을까? 남동생 박원종의 출세를 위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박원종은 마흔 살이 되던 해인 연산군 12년(1506년) 6월, 정승급인 숭정대부에 올랐다. 무과 출신의 박원종이 겨우 마흔 살에 초고속으로 승진할 수 있었던 것은 누나 박씨의 도움 덕분임에는 틀림없었다. 숭정대부를 받은 직후 박원종은 자청해서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한양을 떠났다. 아마도 누나 덕에 승진했다는 소문이 듣기 싫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난 7월에 박원종은 연산군으로부터 누나 박씨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니 속히 한양으로 오라는 명을 받았다. 이 명령에 따라 박원종은 함경도에서 한양으로 되돌아와 박씨를 간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7월 20일 박씨는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박씨의 죽음을 두고도 온갖 의혹과 추문이 난무했다. 박원종이 누이에게 “왜 그렇게 삽니까? 약이라도 먹고 죽으세요.” 라고 모질게 말했다는 기록도 있고, 박씨 부인이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 박씨는 월산대군과의 사이에도 자녀가 없었고, 박씨가 사망할 때 나이가 52세 정도인데, 이 나이의 여성이 과연 잉태할 수가 있었을까? 아무튼 박씨의 죽음과 관련된 의혹을 규명할 방법은 없고, 박씨 부인은 역사에 오명(汚名)을 남긴 비운의 여인이 되고 말았다.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