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종 3편
■ 예종 3편
귀성군 준을 2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에 제수 했다가 곧바로 남이에게 병조판서를 넘기고, 다음해에는 귀성군을 28세의 나이에 영의정으로 임명했다. 병조판서가 된 남이 또한 귀성군과 같은 28세의 젊은 나이였다. 서른도 안 된 영의정과 병조판서는 조선역사 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파격적인 인사였다. 지금으로 보면 28세의 총리와 국방장관인 셈이었다.
세조는 그만큼 한명회, 신숙주등 권신들에게 신물이 난 것이었다. 하지만 귀성군 준이나 남이는 너무 젊었다. 그들이 노회한 권신들을 상대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게다가 세조는 이러한 일들을 완전히 정리하지 못한 채 죽고 만다. 더 큰 문제는 세조가 예종의 왕권강화를 위해 파격적으로 등용한 귀성군 준과 남이를 예종이 아주 질투하고 경계했다는 것이다.
예종은 세자시절부터 세조가 그 둘을 너무 총애하는 것에 질투심을 느낀 듯하다. 귀성군 준과 남이는 예종에게 있어서 양날의 칼이었다. 그래도 귀성군은 젊지만 신중했고, 겸손한 편이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훈구파에도 가까웠지만, 신진세력 및 사림파와도 가깝게 지냈다. 권신들과도 두루 두루 잘 지내는 편이었다. 예종에게도 깍듯이 대하며 자기를 낮추었다. 한 마디로 귀성군 준은 성격이 원만하게 좋았고 적을 만들지도 않았다.
그러나 남이는 달랐다. 세조의 권신 중의 한 사람인 권람의 사위였고, 태종 이방원의 외증손자이기도 했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 출신인 남이에게는 남다른 패기와 야욕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이런 남이가 나이 먹고 노회한 한명회 등의 구공신들의 좋은 먹이감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1468년 9월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했다. 세조의 둘째 아들인 예종은 형인 의경세자가 20세의 나이로 요절함으로써 세자가 되었고, 5년여의 세자 생활을 거친 후 등극하였다. 당시 조선은 한명회 등 공신들이 정사를 농단하는 공신의 시대였는데, 온건한 성품의 예종은 등극하자 의외로 강하게 공신들을 압박하였다. 조선 최대 비극인 4대 사화의 서막이 열리는 시점이었다. 예종이 조금만 깨어난 군주였고, 신진세력과 함께 기득권 세력들인 세조의 권신들에게 대항할 힘을 키웠다면 4대 사화는 아마도 없었을 지도 모른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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