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산군의 여인들 장녹수 3편
■ 연산군의 여인들 장녹수 3편
왕의 총애를 등에 업은 장녹수는 권력을 함부로 휘둘렀다. 그녀는 남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았으며, 각종 뇌물과 인사 청탁을 받았다. 장녹수의 형부 김효손(金孝孫)도 함경도 전향 별감(傳香別監)에 제수되는 혜택을 받았다. 1506년 1월에는 내수사의 여종이었던 언니 장복수(張福壽)와 조카들을 면천해 양인(良人)의 신분으로 올렸다. 1502년(연산군8년)~1503년(연산군9년) 무렵에 이르러서는 연산군이 장녹수에게 빠져 날로 방탕이 심해지고 포악한 짓을 많이 하자, 왕실의 최고 어른인 할머니 인수대비(소혜왕후:성종의 어머니)가 걱정이 되어 누차 타일렀지만, 도리어 왕의 원망만 사게 되었다.
할머니의 근심 어린 충고를 듣지 않고, 연산군은 장녹수를 더욱 가까이 하였다. 장녹수는 입궁한 직후에는 종4품의 숙원(淑媛)으로 있었는데, 이듬해에는 종3품의 숙용(淑容)에까지 올랐다. 궁녀로 들어와 초고속 승진을 한 셈이었다. 품계가 올라간 장녹수는 더욱 권력을 남용하였다. 장녹수는 궁 밖의 사가(私家)를 재건하기 위해 민가를 헐어버리게 하였으며, 미모가 뛰어난 여인을 시기하여 여인의 부모형제를 아무 죄도 없이 하루아침에 다 죽이게도 했다. 옥지화(玉池花)라는 기녀는 장녹수의 치마를 한 번 잘못 밟았다가 참형을 당하기까지 했으니, 장녹수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엿볼 수 있다.
그녀의 위세를 믿고 장녹수 집의 하인들마저 행패를 부렸다. 동지중추부사 이병정(李秉正)은 장녹수의 집 하인에게 크게 모욕을 당했는데, 오히려 사재(私財)를 털어 뇌물을 바치고서야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상황이 이쯤 되니 모두가 출세하기 위해 장녹수 앞에 줄을 서게 되었다. 날로 장녹수와 그 측근들의 횡포로 심해지면서 백성들의 원망은 높아졌고, 결국 연산군의 몰락과 함께 그녀의 몰락도 이어졌다.
기생에서 후궁의 반열에 올라 연산군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했던 장녹수. 독재정치로 종말을 향해 치닫던 연산군의 말년 치세, 그녀는 왕의 광기를 거의 유일하게 제어할 수 있는 존재였지만, 오히려 그녀는 연산군의 음탕한 생활과 악행을 더욱 부추기기만 했다.
무수한 금은보화와 전택(田宅) 등을 하사받았고, 연산군의 몸과 마음을 손위에 놓고 주무르며, 백성들을 괴롭히는데 한 몫을 한 장녹수는 1506년 중종반정 후 반정 세력에 의해 제거 대상 1호로 떠올랐다. 반정군들에게 붙잡혀 군기사(軍器寺) 앞에 끌려온 장녹수는 참형(斬刑)에 처해졌다. 길 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시체에 기왓장과 돌멩이를 던지며 욕설을 퍼부었다. 잠깐 사이 시체 위로 돌무더기가 이루어졌을 정도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연산군에게 향하여야 할 민중들의 분노가 모두 그녀에게로 향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양반가의 여식도 아니었고, 가장 천한 신분의 여인이었으니, 백성들에게는 연산군 대신 화풀이를 할 대상으로 딱 알맞았기 때문이었다.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