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실胎室 수난기 3편
■ 태실(胎室) 수난기 3편
그 시절 수습되어 온 왕실의 태항아리는 우선 시내 당주동 128번지 의 이왕직봉상소(李王職奉常所)에 임시 봉안되었다가 이듬해 봄에 모두 서삼릉으로 옮겨지는 과정을 거쳤다. 그런데 원래 명당만을 골라 모셨을 태실 자리를 포기하고 구태여 태항아리를 한곳에 모으려고 했던 까닭은 또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망국의 왕실이 겪어야 할 수난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태실을 옮겨오기 위해 이 일을 관장한 이왕직의 전사(典祀) 이원승과 유해종이 전국 각처의 태실을 순방한 것이 1928년 8월 무렵이었다. 그 때가 순종 임금이 세상을 떠난 직후였으니, 태실을 한곳에 정리하고자 하는 계획을 구체화하는 데에는 별다른 걸림돌이 없던 시점이었다.
실제로 충남 홍성군 구항면 태봉리에 봉안했던 순종의 태실조차도 1928년 8월 18일에 봉출했다가 홍성군청을 거쳐 그 다음날 서울로 옮겨지는 등 왕실의 위세가 전혀 작용하지 못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어디랄 것도 없이 태실의 관리 현황이 너무 엉망이었다는 점이었다. 이들이 돌아다녀 본즉, 역대 국왕의 태실은 여러 곳이 이미 도굴을 당했고, 심지어 태실이 명당이라 하여 그 자리에다 민간인들이 시체를 암장한 곳도 수두룩한 지경이었다. 그러니 온전하게 태실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태항아리를 모두 한자리에 모아야 한다는 그들의 명분도 고스란히 먹혀 들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가령 충남 예산의 현종(顯宗) 태실은 태항아리 마저 온데간데없었고, 충남 홍성의 순종 태실에는 암매장한 시신 두 구가 나왔다고 전해진다. 현재 서삼릉 태실 구역으로 옮겨진 역대 국왕의 태실 가운데 소화(昭和) 연호가 새겨진 탑지와 더불어 신규 제작된 외호(外壺)에 담겨져 태항아리가 모셔진 사례가 적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이다. 결국 대다수 역대 국왕과 왕실의 태실이 서삼릉으로 옮겨져 마치 공동묘지와도 같은 형태의 군락을 이루게 된 데는 나라 잃은 슬픈 우리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창경궁으로 옮겨진 성종의 태실도 말이 태실이지, 그저 이왕가 박물관의 야외 진열품으로 전락한 채로 남겨졌던 것이다.
더구나 세월이 흘러 창경원은 다시 창경궁이 되었고 이왕가 박물관은 사라진 지 오래니, 이제 성종 태실은 딱히 오갈 데가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성종태실이 더 이상 창경궁 안에 머물러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앞으로의 처리 문제를 문화재청에서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논의해 소중한 문화재로서 대접을 받았으면 하는 소망이다. 그런데 원래 창경궁은 성종 14년에(1483년) 정희왕후(성종의 할머니), 소혜왕후(성종어머니), 안순왕후(예종 비)를 위해 건립한 궁궐이라 하니, 성종 태실이 이곳까지 흘러온 것은 우연이 아닌지도 모를 일이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