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3편
■ 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3편
개혁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공신에 의해 왕권이 제약당했던 중종 역시 이들을 견제할 새로운 정치세력이 필요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성종 때 김종직을 필두로 조정에 등용된 바 있던 사림세력이었다. 이들은 개국공신세력을 뿌리로 하는 훈구파와 달리, 불사이군의 성리학 원칙을 견지하면서 정치에 뛰어들지 않고 향촌에 묻혀 성리학을 탐구하던 재야세력이었다. 사림세력은 도덕성과 수신을 강조하는 성리학이 사회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학문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세력을 대표해 개혁의 전면에 나선 인물이 바로 조광조 (1482~1519)였다.
기세가 왕 못지않던 반정공신들 중 박원종 등 반정 실세들이 중종 7년에 이르러 대부분 죽게 되자, 힘의 공백이 생겼고. 중종은 비로소 왕 노릇을 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이때 중종은 성균관 유생으로 있던 조광조를 만나게 되었다. 중종은 조광조의 이상정치의 실현방법을 수용하고 실천에 옮기려고 애썼다. 당시는 폭군 연산군이 정치와 사회를 휘저어 놓은 직후라서, 그 수습방안으로 조광조의 이상적인 정치관이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종은 홍문관 부제학, 동부승지 등에 조광조를 임명해 늘 가까이에 뒀다. 1518년 10월에는 오늘날 검찰총장에 해당하는 대사헌으로 발탁했다.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조광조는 중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개혁 세력의 선두에 서서 성리학에 입각한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젊은 피를 수혈해 연산군과 차별화되는 왕이 되고자 했던 중종과 조광조의 개혁 의지가 맞물리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깊어졌다. 조광조의 개혁정치를 한마디로 말하면 유교적 이상정치와 도덕정치의 실현이다. 왕이 왕도정치를 수행하고 성리학 이념에 입각한 교화가 백성에게 두루 미치는 사회를 구현하는 것이 그가 추진한 개혁정치의 핵심이었다.
민생을 위한 개혁에도 착수해 농민을 가장 괴롭힌 공물(貢物·지방 특산물을 바치는 세금)의 폐단을 시정하고, 균전제 실시로 토지 집중을 완화했다. 아울러 토지 소유 상한선을 정해 부유층의 재산 확대를 막았다. 조광조는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정치 세력을 만들기 위해 기존의 과거시험 대신에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여, 숨은 인재등용에 힘썼다. 조광조는 과거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기풍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현량과 실시를 강조하여, 1519년 처음으로 현량과가 실시되었다. 현량과의 선출 방법은 유관 기관의 추천을 받아 성품 · 기국(器局) · 재능 · 학식 · 행실 · 지조 · 생활태도 등 일곱 가지를 중심으로 뽑아 임금이 참석한 자리에서 대책(對策, 시무의 방안을 적은 글)만으로 최종 시험을 보여 뽑았다. 과거시험과는 방법이 달랐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