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6일 토요일

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2편

■ 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2편

■ 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2편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한 중종반정(1506년)은 태조 이래 세력을 더해가고 있던 공신세력의 힘을 더욱 강화시켜주었다. 특히 중종반정은 신하들이 직접 왕을 몰아내고 새 임금을 추대했던 만큼 반정공신들의 힘이 막강했다. 이들은 요직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경제적 기반을 확보했다. 또한 공신의 수도 이전과 달리 엄청나게 많아졌다. 개국공신이 45명이었던 반면, 중종반정 때의 공신은 117명에 이르렀다. 이들 중 다수는 실제로는 공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실권을 잡은 박원종, 성희안 등의 주모자가 친인척이란 이유로 공신명단에 끼워놓은 것들이 대다수였다.

일단 공신이 되면 본인은 벼슬이 최고 3등급, 가족들은 2등급이 상승했다. 또한 최고 30명의 노비를 하사받고, 토지도 100결에서 250결까지 얻게 되었다. 게다가 공신전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으니 이들이 받는 특혜는 막대했다. 공신의 급증은 중종반정이 물론 큰 계기가 되긴 했지만, 조선 초 태종, 세조, 예종, 성종 등 즉위과정에서 신하들의 도움을 받았던 임금들이 40~50명씩 공신을 남발한 탓도 있었다. 때문에 경기도 일원의 땅 대부분이 공신들의 땅이 될 정도였다. 이렇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훈구세력은 조선의 기반을 좀먹는 특권층을 구축해 권력을 과시했다. 이들 훈구세력은 고려 말의 권문세족이 그러했듯이 일반민의 토지를 빼앗고 대규모 농장을 조성했다.

어린 나이에 진성대군은 변덕스러운 연산군 밑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껏 몸을 낮추고, 칼날 위에 선 것과 같이 극도로 조심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몸에 밴 탓인지, 왕이 되고나서도 힘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중종은 서슬 퍼런 반정 공신들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고, 그런 까닭에 중종의 살아가는 법은 바로 “연산과 반대로 하기”였다. 사냥이나 연회를 피하고 학문에 열중했으며 신하들의 말에 항상 귀를 기울였다. 중종의 모든 결정은 항상 “조정이 모두 마지않으니 따르노라” 이런 식이었고, 왕의 주도 아래 추진되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다.

이 시기의 백성들의 고달픔은 연산군 시대와 매한가지였다. 개나 소나 공신이니 이로 인해 국가 재정은 궁핍해지고, 점차 국고는 비어갔다. 비는 액수는 백성들에게 거둬들여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갔다. 고려 말 농촌이 그러했듯, 그 부담은 고스란히 백성들 차지가 되었으며, 불안한 정국에 임금이 허약하니 관직의 기강 해이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수령들은 돈을 주고 관직을 샀으니 그 몇 곱절로 본전을 뽑으려 백성의 등골에 빨대를 꽂았고, 어사를 파견하여 적발하고 처벌을 했지만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여기에 가뭄, 홍수, 우박에 지진까지 찾아오니, 고향을 떠나 떼도적이 되는 백성들이 부지기수였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