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1편
■ 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1편
선비는 물에 빠져도 개헤엄을 치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너무나 곧아서 휘어지지 않고 부러져버리는 사람으로, 조선시대 개혁의 아이콘, 곧은 선비의 상징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의 이름을 《조선왕조실록》에서 검색하면 총 910건이 나온다. 38세 짧은 생을 살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많은 숫자이다. 그만큼 조광조는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한때는 중종의 절대적인 총애를 받았던 참모였지만, 한순간 역모 혐의를 쓰고 나락으로 떨어진 인물. 그러나 그가 죽고 난 뒤, 사림파가 정치의 실권을 차지하면서 조광조는 사림파의 상징으로 거듭나게 된다.
조광조는 감찰 조원강(趙元綱)의 둘째 아들로 한성에서 태어났다. 조광조는 17세 때 북쪽의 어천도 찰방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희천에서 유배중인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했다. 조광조는 천성이 총명할 뿐 아니라 부지런하고 수수해 한훤당의 문하에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조광조는 이때부터 시문은 물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는 데 힘을 쏟아, 20세를 전후해서 가장 성실하고 촉망받는 청년학자로 꼽혔다. 점필재(김종직의 호)의 학통을 이은 한훤당 문하에서도 군계일학이 되었던 것이다.
1499년 한산 이씨와 혼인한 조광조는 이듬해 부친이 사망하자, 부친의 묘소 아래에 초당을 짓고 3년상을 치렀다. 1510년 과거 초시에 응시해 장원으로 합격했으나 이듬해 모친상을 당해 관직 진출이 늦었다. 학문이 깊고 행실이 올곧은 조광조는 관계(官界)에 나가기도 전에 사림파의 촉망받는 선비가 되었고, 그로 인해 23세 때에는 유배되는 몸이 되었다.
1504년(연산군10년) 임사홍(任士洪)이 궁중세력과 결탁하여 신진사림들의 제거를 꾀했다. 곧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위될 때 신진사류인 이극균 · 김굉필 등이 찬성했다 하여 이들을 처형하게 하고, 나머지 신진사류들을 삭탈관직하거나 유배를 보낸 것이다. 이것을 갑자사화(甲子士禍)라고 하는데, 아직 관직에 오르지도 않은 조광조도 여기에 끼어있었다.
정계의 매서운 현실을 몸소 겪은 조광조는 첫 유배지에서 학문에 더욱 힘쓰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는 1510년(중종5년) 29세 봄, 진사회시(進士會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본격적으로 관계에 진출했다. 관계에 진출한 뒤, 조광조는 뛰어난 학문과 인격으로 중종의 신임을 두텁게 받았고 사류들의 명망을 한 몸에 모았다. 조광조의 정치관은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왕도정치를 실현한다는 것이었다. 왕도정치의 구체적인 실현방법은 왕이나 관직에 있는 자들이 도학(道學)을 실제로 이행하는 도학(道學)정치이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