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일 수요일

태실胎室과 태항아리 4편

■ 태실胎室과 태항아리 4편

■ 태실(胎室)과 태항아리 4편

왕실에서 전국 방방곡곡의 명당을 찾아 태실을 조성한 배경에는 풍수사상이 만연해 있던 조선시대에 명당길지를 모두 왕실에서 차지할 의도도 숨어 있었다. 백성이나 왕실이 모두 풍수사상을 신봉하던 시대였던 만큼, 만약 일반 백성이 좋은 길지를 찾아 쓰면, 왕조에 위협적인 인물이 배출된다고 왕실에서는 생각했던 것이다. 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뜻도 있었다. 각지의 길지를 찾아 태를 묻은 또 다른 의도는 왕실과 일반 백성간의 유대 강화다. 태실을 조성함으로써 도성과 먼 지방의 백성들에게도 왕실이 가깝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고, 거기다가 태실이 조성되는 지방은 군(郡)으로 승격시키고 세금과 노역을 덜어주는 혜택까지 주어 왕족의 태실을 서로 자기 고장에 모시려는 경쟁심을 유발하여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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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남아 있는 태실 중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크고,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은 ‘사적444호로 지정된 세종대왕 왕자 태실이다. 세종대왕 왕자 태실은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태봉산에 있다. 월항면에 들어서서 크고 작은 몇 개의 고개를 넘어 굽이굽이 산길을 따라 걸으면 저수지를 만나게 되고, 이 저수지를 돌아 오르면 수려한 산세가 사방을 둘러싼 놀라운 풍경을 만나게 된다. 이곳이 태실이 있는 태봉산이다. 태실을 조성하기 위한 풍수학적 대길지라고 할 만한 충분한 조건을 갖춘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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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세종대왕이 낳은 18명의 아들 중 세자인 문종을 제외한 17명의 아들과 원손인 단종의 태를 묻은 곳이다. 세종대왕은 본처인 소헌왕후와의 사이에 태어난 8명의 대군을 포함하여 모두 18명의 왕자를 두었다. 이 중 세자였던 문종을 제외한 왕자들의 태실을 모두 이곳 서진산 자락의 태봉산에 모아 놓았다. 비운의 왕 단종의 태실은 숙부들과 멀리 떨어진 한 구석에 안치되어있다. 세종대왕 왕자태실 아래에는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선석사’가 있다. 이곳에 태실이 조성되면서 태실을 수호하는 절이 되었다.

태실은 조선왕조 초기부터 지방관의 책임 하에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태봉에 불이 나서 군수를 좌천시켰다거나(중종실록), 태봉 관리를 소홀히 한 지방관을 잡아들인 일(선조실록)이 있는 것을 보면, 왕실에서 태를 안치한 이후에도 지속적인 관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성계의 태실 역시 옥계부사를 두어 수호케 하고 3년마다 안위제(安慰祭)를 지내는 것이 관례였다.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