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혜왕후인수대비 4편
■ 소혜왕후(인수대비) 4편
인수대비는 《내훈》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며느리가 잘못하면 이를 가르칠 것이고 가르쳐도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릴 것이고, 때려도 고치지 않으면 쫓아내야 한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이 말은 그대로 실행되었다. 유학적 소양을 갖춘 엄격한 성격의 인수대비는 윤비의 행동을 결코 용납하지 못하였다. 인수대비는 윤비의 폐출(廢黜)과 사사(賜死)에 깊이 관여했고, 이는 평탄하지 않은 불행한 미래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성종 주변에는 많은 여성들이 있었고, 윤비는 이를 참지 못했다. 성종이 엄귀인과 정귀인을 총애하자 윤비는 왕의 총애를 되찾고자 했다. 왕실 여성들 사이에는 이른바 압승(壓勝)이라 불리는 이른바 저주행위가 있었는데, 들키게 되면 큰 화(禍)가 되었다. 윤비의 처소에서 극약인 비상과 이를 바른 곶감이 발견되자, 인수대비와 성종은 이 곶감이 왕과 후궁을 죽이려는 의도라 생각했다. 야사에는 윤씨가 성종과 다투면서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다고도 하나, 확실치는 않다. 결국 윤비는 왕비가 된지 8개월 만에 폐비(廢妃)가 되어 사가로 쫓겨났고, 여전히 반성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받아 결국 1482년(성종13년) 8월에 사사(賜死)되었다.
대신들은 윤씨의 폐비와 사사 문제를 원자의 친모라는 이유로 반대했으나, 성종의 입장은 단호했다. 인수대비 또한 폐비 윤씨가 살아 있으면 화근(禍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폐비 윤씨를 대신하여 윤호의 딸 파평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파평 윤씨는 대비들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고, 인수대비는 “이제 중전다운 사람이 들어왔으니 낮이나 밤이나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며 기뻐했다. 며느리를 죽임으로써 후환을 없애고자 생각한 인수대비의 판단은 완전 오판(誤判)이었다. 윤씨를 죽인 이듬해 인수대비는 정희왕후(세조 비)와 함께 온양을 갔는데, 여기서 정희왕후가 죽고, 성종 또한 재위 25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성종은 자신의 사후 100년 동안 폐비 윤씨의 사사 사건을 절대로 공론화 하지 않도록 유언을 남겼다.
인수대비는 왕위에 오른 손자 연산군으로부터 많은 원망을 받았다.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된 연산군은 폭군으로 변해갔고, 방탕한 생활로 국정을 파멸로 몰아갔다. 인수대비는 연산군의 광폭함을 누차 지적하고 타일렀으나 오히려 원망만 살 뿐이었다. 연산군은 부친의 후궁이자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간 엄숙의(嚴淑儀)와 정숙의(鄭淑儀)를 궁 안뜰에 결박하고서는 아들인 안양군 항(㤚)과 봉안군 봉(㦀)을 불러 모친들을 때리게 만들었다. 이어서 분이 풀리지 않은 연산군은 항과 봉의 머리채를 쥐고 인수대비의 침전으로 가 방문을 열고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하며, 항을 독촉하여 술잔을 드리게 하니, 인수대비가 놀라 잔을 받았다. 연산군은 엄숙의·정숙의를 죽인 뒤 시신을 가져다 찢어 젓을 담그고 산과 들에 흩어 버렸다고 하나 진위는 확실치 않다.
- 5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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