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혜왕후인수대비 3편
■ 소혜왕후(인수대비) 3편
1469년 11월 28일 자을산군, 즉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사가에 머물던 한씨는 왕의 어머니(대비)로서 다시 궁궐로 돌아왔다. 청상과부가 되어 궁궐을 떠난 지 12년만이었다.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 의경세자의 위호(位號:벼슬의 등급 및 이름)와 어머니의 위상 문제가 거론되었다. 성종 1년에 의경세자의 시호를 온문의경왕(溫文懿敬王)으로 하고, 수빈의 휘호를 인수왕비(仁粹王妃)로 하여 예종비와 인수왕비를 형제의 서열로 차서(次序:순서)를 정하였다. 그리고 2년 뒤 인수대비는 남편이 덕종(德宗)으로 추존됨에 따라 덕종비(德宗妃)가 되었다. 사실 인수대비는 생전의 존칭이었고, 죽어서는 소혜왕후(昭惠王后)라는 시호를 받았다.
어려서 부모와 남편을 잃은 탓에 인수대비는 불교에 심취하였고, 성종이 도첩제(度牒制:승려허가증)를 실시하여 불교를 탄압하자, 이에 불만을 품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성리학의 이념은 여성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다. 특히 여성에게 요구된 가장 큰 임무 중의 하나는 ‘현모양처(賢母良妻)’로 규정되는 남편을 잘 섬기고,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이었다. 여성에게 유교적인 덕목을 가르치기 위해서 일종의 교재가 필요했는데, 왕실 어른으로서 늘어가는 왕실 여성들을 교육시켜야 하겠다는 필요성을 절감한 인수대비는 1475년(성종6년) 궁중의 비빈(妃嬪)과 부녀자들을 훈육하기 위해 내훈(內訓)이라는 책을 편찬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 39살이었다.
인수대비는 이 책에서 부인들의 모범적인 사례를 들어 이해도를 높이고 부부의 도리, 형제와 친척 간의 화목 등 여성으로서 갖춰야 할 유교 덕목을 실어 여성도 유교적 도리를 알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는 원리가 기본이 되는 오늘날의 기준에는 맞지 않는 내용일 것이다.
인수대비의 일생에 있어서 며느리 윤비(尹妃)와의 관계는 그야말로 불행 중의 불행이었다. 이상적인 여성상을 목표로 한 인수대비에게 윤비는 성에 차지 않는 며느리였다. 원래 성종의 부인은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였으나, 그녀가 1474년 후사 없이 일찍 죽는 바람에 연산군을 잉태한 후궁 윤씨가 중전의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인수대비 한씨와 왕비 윤씨는 서로 성격상 물과 기름같이 섞일 수 없는 생각과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인수대비에게 막강한 친정 세력이 있었다면, 윤비는 그렇지 못했다. 가난한 대간(臺諫) 집안 출신의 딸로서 그를 후원해 줄 부친도 없는 신세였다. 또한 유교적 부덕을 완벽하게 실천하고 강요했던 인수대비와 달리 윤비는 자유 분방하고 사랑을 중요시하여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성종은 그렇게 지순한 사랑을 주는 인물이 아니었다.
-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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