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혜왕후인수대비 2편
■ 소혜왕후(인수대비) 2편
세조의 맏아들 도원군이 의경세자로 책봉되자, 자신의 딸 한씨도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수빈(粹嬪)이 되었다. 수빈 한씨가 된 그녀가 왕비 자리에 오르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인지, 부친인 한확이 세자책봉의 고명(誥命:중국 황제가 주는 임명장)을 받아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망하고 말았다. 세자빈이 된 이듬해의 일이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위세가 등등했던 한확이었지만, 객사(客死)라는 불운을 맞이한 것이었다. 부음(訃音)을 듣고 놀란 세조는 압록강으로 관리를 급파하여 그의 시신을 호송하였다. 수빈 한씨는 부친이자, 막강한 정치적 후견인을 하루아침에 잃고 말았다.
부친의 사망에 이어 불운은 계속되었다. 수빈 한씨는 결혼 직후 맏아들 월산대군과 명숙공주를 낳았고, 이어서 1457년(세조3년)에 둘째 아들이자 훗날 성종이 되는 자을산군(자산군)을 출산하였다. 그러나 남편인 의경세자가 갑작스런 질병으로 사망하는 청천벽력(靑天霹靂)과도 같은 불행이 찾아왔다. 이때 의경세자의 나이 20세였고, 한씨는 21세에 불과하였다. 불과 2년 3개월의 짧은 세자빈 생활이었다. 부친과 남편이 1년 간격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슬픔에 빠져 있을 새도 없이 그녀는 왕비의 꿈을 접고 사가(私家)로 물러나야했다. 세조가 맏며느리 한씨에게 특별히 궁궐에서 살아도 좋다고 하였음에도 이를 사양하고 두 아들과 궁궐을 떠나려하자, 이를 가엽게 여긴 세조는 그녀를 위해 특별히 집을 지어주었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덕수궁이다. 한씨의 죽은 남편 의경세자 사당 옆에 건설되었으며, 일반적으로 고위 사대부나 왕족이 살던 사저보다 그 규모가 크고 웅장하여 훗날 선조가 임진왜란 중에 임시 거처로 사용하기도 했다. 후에 한씨의 작은 아들 자산군이 보위에 올라 임금의 어머니로서 다시 궁궐에 들어가자, 그녀의 큰아들 월산대군이 사저를 물려받았다.
남편이 죽지 않았더라면, 아니 부친이라도 살아 있었더라면 최소한 세자 자리는 의경세자의 맏아들이자 세조의 장손인 월산대군에게 주어졌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8살에 불과한 시동생 황(晄-예종)이 세자로 책봉되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다. 세자 시절에는 건강했던 예종은 부친인 세조의 병간호와 즉위 후의 격무에 시달려 건강이 좋지 못했다. 죽어서 예종이라는 시호를 받고 싶다는 말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종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예종의 아들(제안대군)이 아직 어려, 정희왕후는 후계자를 빨리 정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독촉에 한씨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자산군)을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서열상 장남인 월산군이 왕위에 올랐어야 하지만, 월산군은 병치레가 잦고 동생인 자을산군의 도량이 왕재감이라 하여 자을산군이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이는 핑계에 불과하고(물론 기록에는 없지만), 자을산군의 장인인 한명회의 정치적 위상이 작용했음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이다.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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