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7일 일요일

문정왕후 4편

■ 문정왕후 4편

■ 문정왕후 4편

그러나 문정왕후도 세월의 벽은 넘지 못했다. 1565년 4월 창덕궁 소덕당에서 65세를 일기로 문정왕후가 사망하면서 외척정치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녀가 죽었을 때 사관은 실록에 《서경(書經)》을 인용해 『암닭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 종사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뿐이다. 윤비(문정왕후)는 사직(社稷)의 죄인이다.』 라고 적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관의 기록은 숭유억불 정책으로 성리학을 국정이념으로 삼고 있는 조선의 유학자 사관들이 쓴 기록이므로 사실여부를 믿기는 어렵다. 후원자를 잃은 윤원형과 그의 첩 정난정은 사림파의 탄핵을 받고 황해도 강음으로 유배된 후 최후를 맞았다. 보우는 유생들의 탄핵을 받아 제주도에 귀양을 갔다가 그곳에서 목사 변협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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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는 남성중심의 유교정치 시대였다. 그런 조선 오백년 동안 가장 강력한 정치권력을 쥐고 흔들었던 대표적인 조선의 한 여인을 말하라고 한다면 단연 문정왕후가 될 것이다. 외척이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정상적인 정치 질서가 자리 잡지 못하던 시대의 중심에 문정왕후가 있었다.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문정왕후의 모습은 오래 전 여인천하에서 나오듯이 크고 작은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른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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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왕후는 사후(死後) 중종 곁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이미 중종의 무덤 옆은 인종의 생모인 제1계비 장경왕후가 묻혀 있었다. 1542년 문정왕후는 보우와 의논해 현재의 고양시 서삼릉에 있던 중종 왕릉을 선릉(성종의 무덤) 부근으로 옮겼다. 중종의 무덤이 아버지인 성종 곁에 가야 한다는 것이 그 명분이었다.

그러나 새로 옮긴 중종의 무덤(정릉:선릉과 함께 보통 선정릉으로 지칭된다)은 지대가 낮아 침수 피해가 잦았다. 홍수 때는 재실(齋室)까지 물이 차기도 했다. 결국 문정왕후 사후 아들 명종은 어머니의 무덤을 태릉(泰陵)으로 조성했다. 중종 곁에 묻히려던 그녀의 꿈을 아들이 지켜주지 못한 것이다. 그 뒤 명종의 무덤인 강릉(康陵)이 태릉 옆에 조성돼 명종은 죽은 뒤에도 어머니의 치마폭을 벗어나지 못하는 형국이 되었지만, 1966년 태릉선수촌이 조성되면서 두 모자는 서로를 쉽게 볼 수는 없게 되었다. ‘태릉선수촌’ 이라는 이름으로 아주 익숙한 ‘태릉’이 정작 명종 대 폭풍 정국을 이끈 문정왕후의 무덤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은 듯 하다.

문정왕후가 억지로 무덤을 옮기는 바람에 중종 또한 피해자가 됐다. 자신과 함께 했던 3명의 왕비 그 어느 누구와도 영원히 함께 묻히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