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정왕후 5편
■ 문정왕후 5편
문정왕후 사후에 논쟁이 가장 치열한 부분이 문정왕후에 의한 불교 부흥이다. 문정왕후에 의한 불교부흥은 숭유억불을 국정이념으로 삼은 성리학자들이 보기에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우리나라 전체 역사적으로 보면 커다란 치적이 될 수 있기도 하다. 문정왕후는 승려 보우(普雨)를 신임해 1550년 선교 양종을 부활시키고, 승과와 도첩제를 다시 실시하는 등 불교 부흥을 꾀했다. 문정왕후가 도첩제를 다시 시행하여 2년 여 년 동안 5000여 명의 승려를 뽑고 폐지 됐던 승과시를 부활시켜 훌륭한 승려를 배출했다. 그 대표적 역사적 인물이 바로 휴정(休靜) 서산(西山)대사, 유정(惟政) 사명(泗溟)대사이다.
이 승려들은 명종 이후 선조 대에 발발한 임진왜란 때 승군으로서 위기의 나라를 구하는 주체가 됐으니 문정왕후와 보우의 불교 중흥 정책은 역사적으로 보면 치적(治績)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문정왕후는 조선의 성리학자들로부터는 정권을 휘두른 악후(惡后)로 평가절하되지만, 남성중심, 성리학 중심의 조선사회에서 여자의 몸으로 정권을 잡고 불교를 중흥시키는 등 탁월한 전략가이자 정치가로서의 역할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만약 요즘 시대에 태어났다면 여성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지는 않을까.
명종은 어머니 문정왕후의 등쌀과 외숙부윤원형(尹元衡)의 전횡으로 재위 내내 아무것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외아들 사망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재위 22년만인 1567년 허무하게 죽으니 그의 나이 겨우 34세였다. 이렇듯 반정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앞세운 중종도 뚜렷한 업적도 남기지 못했고, 그의 아들들인 인종과 명종 역시 외척들의 갈등 속에서 제대로 기를 펴지도 못하고 존재감 없이 사라져갔다.
명종은 부인 심씨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을 뿐, 후궁으로부터도 자녀를 하나도 얻지 못했다. 그런데 그 하나 뿐인 아들(순회세자)이 열세 살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이에 후사를 걱정하던 명종은 배다른 형제 덕흥군의 아들 셋을 불러 자신이 쓴 익선관을 벗어서 써보라고 했다. 위의 두 아들은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익선관을 머리에 써보았는데, 다른 아들들과 달리 셋째인 하성군은 “성상께서 쓰시는 것을 신하된 자가 어찌 쓸 수 있겠나이까”라고 하여 명종의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이 하성군이 명종의 뒤를 이어 선조가 되었다.
문정왕후와 윤씨 일파가 모두 죽은 후, 이들의 자리를 메운 것은 사림파들이었다. 그동안 4번에 걸친 거듭되는 사화로 사림은 많은 유학자를 잃었다. 하지만, 전국 각지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길러낸 덕분으로, 문정왕후가 죽자 봇물처럼 정계에 등장하여 윤원형 일파를 제거하는 등 오랜 만에 중앙무대를 장악하면서 권력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제부터 역사는 이들 사림파간의 붕당정치로 인한 당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서게 된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