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국정농단 사건 5편
■ 조선시대 국정농단 사건 5편
돌이켜보면 정희대비의 불명예 퇴진은 사소하다면 사소한 익명서 사건이 발단이었다. 그리고 익명서의 발단은 정희대비의 친정과 측근 조두대의 국정농단으로 최개지가 억울하게 패소했다고 하는 소송사건이었다. 그런데 실제 최개지의 패소가 국정농단 때문인지 아니면 최개지 본인의 잘못 때문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최개지 사건은 흐지부지되었고, 정희대비의 친정과 조두대에 대한 조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종 14년(1483) 정희대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조두대의 영향력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비록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은 끝났지만 왕실 최고 어른으로서의 영향력은 여전했고, 조두대에 대한 신임 역시 여전했기 때문이다. 정희대비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조두대는 연이어 인수대비의 강력한 신임을 확보함으로써 정치적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이른바 변처녕(邊處寧) 사건이었다.
성종 22년(1491년) 겨울, 명나라 황태자가 조만간 책봉되리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성종은 이를 축하하기 위해 진하사(進賀使:축하사절)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성종 23년 봄에 진하 정사에 정괄, 부사에 변처녕이 임명되었다. 당시 조선의 거상(巨商) 재벌들은 북경무역을 통해 큰 이익을 남겼다. 조선에서 북경으로 갈 때는 인삼을 가져다가 팔아 이익을 남겼고, 올 때는 또 비단이나 고급 약재를 가져와서 이익을 남겼다. 하지만 북경무역을 위해서는 사신 행렬에 합류해야만 가능했다. 이에 따라 명나라 사행(使行)이 결정되면 조선을 대표하는 거상(巨商)들 사이에 격렬한 경쟁이 벌어졌다.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거상(巨商) 재벌은 고귀지(高貴枝)와 조복중이었다. 고귀지는 정희대비의 친정인 파평 윤씨에 줄을 대고 있었고, 조복중은 조두대의 조카였다.
진하부사에 임명된 변처녕은 처음에 고귀지의 아버지 고윤량(高允良)을 수행군관 명목으로 사신 행렬에 합류시켰다. 본래 수행군관은 사신을 호위하기 위한 무관이기에 장사꾼이 할 수 없는 임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귀지의 아버지는 돈과 인맥을 동원해 그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가 갑자기 조복중으로 교체되었다. 당연히 고귀지는 조복중이 자신보다 더 많은 뇌물을 썼거나, 아니면 조두대를 이용했을 것이라 짐작했다. 분개한 고귀지는 조복중을 찾아가 크게 따졌다. 싸움이 커져 결국 사헌부에 적발되었고 정치문제로 비화되었다.
- 6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