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국정농단 사건 6편
■ 조선시대 국정농단 사건 6편
사헌부를 비롯한 삼사에서는 변처녕은 물론 고귀지와 조복중도 엄히 조사해 처벌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의금부에서는 고귀지와 조복중을 체포해 조사했다. 그런데 당시 백성들 사이에는 조복중은 분명 죄를 받지 않을 것이고 엉뚱한 사람만 화를 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배후인 조두대를 처벌하지 않는 한 조복중 처벌이 불가능하다는 여론이었다. 이에 따라 삼사에서는 조두대도 엄히 조사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여론의 예상대로 조두대에 대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진하부사 변처녕은 교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패가망신했다. 하지만 조복중은 멀쩡했다. 재상급인 변처녕도 패가망신하는 마당에 천민인 조복중이 멀쩡했다는 것은 결국 조두대의 영향력이 그 정도로 막강했다는 반증이었다.
위 사건이 일어난 성종 23년은 이미 정희대비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일이 발생한 이유는 비선실세로서의 조두대의 내알이 여전히 강력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두대의 내알을 받아준 사람은 인수대비였다. 정희대비와 비교할 때 인수대비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우선 정희대비는 문자를 몰랐지만 인수대비는 문자를 알았다. 또 정희대비는 수렴청정을 했지만 인수대비는 그러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대비 사이에는 같은 점도 많았다. 가장 현저하게 드러나는 같은 점은 내알을 조장했다는 사실이었다.
수렴청정을 하지도 않은 인수대비는 왜 조두대를 측근에 두어 내알을 조장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조두대를 시부모인 세조와 정희대비가 아꼈기 때문이었다. 시부모가 쓰던 사람을 며느리 입장에서 매정하게 내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인수대비는 정희대비와 마찬가지로 조두대에게 매우 자비로웠다. 인수대비는 아들인 성종이나 월산대군 그리고 손자인 연산군에게는 매정한 어머니 또는 할머니로 알려져 있지만 측근에게는 매우 자비로웠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볼 때 그 자비심이 공식적인 행정조직을 무력화하고 내알을 조장했으며, 성종의 치세를 불명예스럽게 만들고 말았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