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5편
■ 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5편
조광조와 신진사류는 개혁정책을 눈치 없이 끝까지 밀어부친다. 이에 중종도 어쩔 수 없이 위훈삭제를 일부 받아들이지만 중종은 조광조에 대해 마음 속 깊이 앙심을 품게 되었다. 공신 재조사가 이뤄졌을 때 위훈자의 숫자는 70명이 넘었다. 조광조는 가짜로 훈작을 받은 자들을 조사해 이들에게 준 관직, 토지, 노비와 저택 등을 몰수하면서 정치권 대변혁을 준비해나갔다. 조광조의 입장에서 훈구파는 반드시 청산해야 할 대상이자, 적폐 세력이었다. 이 조치로 117명 중 초기에 거짓이 적발된 12명 말고도 76명이 공신 명단에서 삭제됐고, 당연히 직책과 재산도 몰수되었다.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야기시킬 게 뻔한 일이었다. 훈구파들은 중종의 마음이 조광조에게서 이미 떠나있음을 눈치챘다. 중종은 용렬한 자질을 지닌 범상한 인물이었다. 임금에게 도학정치를 끊임없이 설파했으나 임금은 지루하고 귀찮아했다. 더욱이 임금은 조광조 앞에서 자세를 흐트릴 수도 없어 오랜 시간을 꼿꼿하게 앉아 있어야 했고, 눈을 들어 조광조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으며, 무식이 탄로 날지 몰라 질문도 마음 놓고 하지 못했다. 그러니 어떤 때에는 조광조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노골적으로 훈구파 기득권을 박탈하려는 조광조의 움직임에 훈구 세력도 더 이상 방관하지 않았다. 이들은 왕실이나 정치권에 심어둔 정치 세력을 적극 활용해 반격의 기회를 엿봤다. 훈구파는 왕에게 수시로 조광조의 위험성을 알렸다. 경연을 통해 왕을 압박하는 조광조가 왕권까지 넘보는 인물임을 강조했다. 남곤, 심정, 홍경주 등 훈구파들은 후궁인 경빈 박씨와 희빈 홍씨를 통해 중종에게 조광조를 모함하는 한편, 궁중 나인을 시켜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走와 肖를 합하면 趙가 되므로 조 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라는 글씨를 새겨, 거기에 꿀을 발라 벌레가 글자대로 갉아먹게 한 것이다. 그리곤 글자가 새겨진 나뭇잎을 역모의 증거로 중종에게 바치는 정치공작을 벌였다. 또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조직하여 조정을 문란하게 한다고 무고했다. 곧 공신들을 헐뜯어 몰아내고 권력을 잡으려 한다고 끊임없이 모략질을 해댄 것이다.
한때 최고의 참모였지만 왕을 압박할 만큼 강한 개혁 드라이브에 지친 중종은 더 이상 조광조의 후원자가 될 수 없었다. 중종 역시 개혁조치를 한 치의 양보 없이 강도 높게 요구하는 조광조 등의 사림세력에 부담을 느꼈다. 모든 상황은 조광조 일파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1519년 11월 조정은 조광조를 전격 체포하고, 그의 죄상을 알렸다. 중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 사건을 계기로 사림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벌였다. 기묘사화(1519년)였다.
- 6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