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6편
■ 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6편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한 개혁을 추진하던 조광조가 눈에 거슬리던 중종은 조광조를 당장 투옥시켰다. 조광조의 죄목 중 가장 큰 것은 붕당을 맺어 자신의 세력을 확산시켜 나간다는 것이었다. 중종이 왕위에 오른 후 정책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혜성처럼 등장한 조광조는 중종에게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참모였다. 왕과 신하가 아닌 정치적 동지로서 두 사람은 결합했지만, 왕과 신하라는 다른 위치에 있던 두 사람의 동거는 언젠가는 파국으로 치달을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비록 반정에 의해 추대된 왕이었지만 점차 자신의 왕권을 확대해가려는 중종과 성리학에 입각해 왕권을 견제하려는 조광조의 입장이 충돌한 셈이다.
조광조는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으나 영의정으로 있던 정광필의 적극적인 변호로 목숨만은 건진 채 능성(綾城, 오늘날의 화순 능주)에 위리안치되었다. 신진사류들의 상소가 연일 이어져 조정 안팎이 시끄러웠다. 조광조는 유배지에 있으면서 다가올 운명을 알아차렸는지 불평 한마디 없이 조용히 지냈다. 훈구파의 끈질긴 공격으로 마침내 조광조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금부도사가 사약을 들고 오자, 조광조가 조용히 물었다.
“주상께서 신에게 죽음을 내리신다면 합당한 죄명이 있을 것 아니요? 그 죄명을 듣고 싶소.”
도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조광조는 뜰에 내려와서 북쪽을 향해 두 번 절을 하고 무릎을 꿇고 사약의 교지를 받았다. 그리고 허락을 받고 집에 편지를 써서 조상의 무덤 옆에 자신을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조광조는 사약을 들이켰으나 죽지 않았다. 포졸들이 목을 묶으려 하자 “성상이 미신(微臣)의 머리를 보호하려 약을 내렸는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이 따위 짓을 하려 하느냐?”고 질책하면서 독약을 탄 소주를 마시고 누워서 피를 쏟으며 죽었다. 그의 묘소는 용인 심곡에 자리를 잡았고, 그 언저리에 그를 기리는 심곡서원이 후에 세워졌다.
이 사건으로 조광조는 사사되고, 김정, 김식, 김구, 정광필 등 핵심 사림세력은 유배되거나 파직되었다. 조정의 사림세력은 급격히 위축됐다. 그러나 조광조세력의 개혁은 선조 이후 다시금 정계에 진출한 사림세력의 이념적 지주로 자리 잡으면서 조선 후기의 정치에 막대한 영향을 남겼다. 조광조는 목숨을 걸고 자신의 이상을 현실정치에 실행하려 했다. 때문에 그는 후대 사림들로부터 붕당과 정파를 초월하여 추앙받았다. 조광조는 선조 초에 마침내 영의정에 추증(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 그 관위를 높여 줌)되었고, 문묘에 배향(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모심)되었다.
조선 중기에 태어나서 그 이상을 맘껏 펴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이상 정치는 후세 선비들의 귀감이 되었다. 16세기 초반 화려하게 등장했다가 5년 만에 좌절된 그의 정치 행적은 당시에도 보수와 현실 정치의 벽이 얼마나 두터웠던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