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성룡과 징비록懲毖錄 1편
■ 류성룡과 징비록(懲毖錄) 1편
임진왜란의 일등공신(一等功臣)을 물어보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을 첫 번째로 꼽을 것이다. 하지만, 백성과 조정을 버리고 살길을 찾아 피난을 간 선조를 대신해서 영의정으로 전쟁 현장에서 중요한 상황을 판단했던 전시(戰時) 최고 참모로 활약한 류성룡과 그가 남긴 징비록(懲毖錄)의 가치를 간과(看過)해서는 안 된다. 선조실록을 통해서 본 류성룡의 공과(功過)에 대해 기록은 대체로 부정적인 기록이 많다. 이는 당시 집권세력인 서인(西人)의 관점에서 기록되었으므로 남인의 영수(領袖)인 류성룡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으로 왜곡되고 폄하되었을 것이다.
징비록(懲毖錄)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1592년(선조 25년)부터 1598년까지의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의 원인과 경과, 전황, 상황에 대한 반성 등을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징비록(懲毖錄)에서 ‘징비’는 시경 소비편(小毖篇)에 나오는 문장 “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後患)”, 즉 “미리 징계해 후환을 조심한다” 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류성룡은 징비록 서문의 첫머리에서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목적을 밝히고 있다. 전란(戰亂)의 발단과 원인을 규명하고 경과를 밝힘으로써 전란에 대한 반성과 재발을 방지하기 위함인 것이다.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임진왜란을 경험한 류성룡은 1598년 11월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와 ‘징비록(懲毖錄)’을 남겼다. 임진왜란에 관한 기록은 징비록 외에도 오희문의 ‘쇄미록’, 정경운의 ‘고대일록’, 이노의 ‘용사일기’, 조경의 ‘난중잡록’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류성룡이 전란 당시 좌의정과 병조판서, 영의정, 도체찰사 등 최고 직책을 맡고 있었던 상황을 고려하면 류성룡이 남긴 징비록의 가치는 매우 크다. 구체적인 전개 과정과 명나라 군대의 참전과 강화 회담의 뒷이야기, 백성들의 참상 등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는 위치에서 저술한 기록이란 점에서 객관성과 신뢰성이 큰 자료이며, 임진왜란의 역사적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책이다.
징비록은 조선과 일본, 명나라 사이의 외교전을 비롯해 전란으로 인해 극도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생활상, 이순신, 신립, 곽재우 등 전란 당시 활약했던 인물의 공적과 인물평도 상세히 기록돼 있다. 징비록은 1633년(인조 11년) 아들 유진이 류성룡의 문집인 서애집을 간행하면서 그 안에 처음 수록하였고, 이후 1647년 그의 외손자인 조수익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던 중 16권으로 구성된 징비록이 간행되었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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