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의장군 곽재우 5편
■홍의장군 곽재우 5편
일본군이 먼저 침입한 경상도에서 의령의 곽재우가 의병을 제일 처음 일으켰고, 합천의 정인홍(鄭仁弘), 고령(高靈)의 김면(金沔)이 의병을 모아 경상우도를 지켰다. 영천의 권응수(權應銖)는 관군과 협동작전을 전개해 영천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전라도에서는 담양(潭陽)의 고경명(高敬命), 유팽로(柳彭老), 고종후(高從厚) 등이 의병을 조직해 거사했다.
충청도에서는 조헌과 승려 영규(靈圭) 등이 활약했으며, 경기도에서는 홍계남(洪季男), 우성전(禹性傳) 등이, 황해도에서는 전 연안부사 이정암(李廷馣)이 부대를 조직한 뒤 강화의 김천일(金千鎰) 부대 등과 연합해 일본군을 물리쳤다. 함경도에서는 정문부(鄭文孚) 등이 나서 길주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승병들의 활약도 컸다. 평안도에서는 승려 휴정(休靜, 서산대사)이 묘향산에서 전국 승려에게 격문을 보내어 일본군에 맞서 싸울 것을 호소했다. 그는 승병부대를 조직해 평양성 수복전투에 공을 세웠다. 강원도의 유정(惟政, 사명대사) 등도 거사했다. 이외에도 김덕령(金德齡), 최경회(崔慶會), 유종개(柳宗介) 등이 의병활동을 했다. 이로써 1593년(선조 26)에는 전국적으로 활동한 의병의 규모가 2만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과 명나라의 화의가 진행되어 전쟁이 지지부진하게 장기화되었고, 그 가운데 대부분 농민이었던 의병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조정에서 전후 경제적 안정을 위해 농민에 대한 징세(徵稅)를 강화했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건만, 논공행상은커녕 돌아온 것은 가혹한 세금 통지였던 것이다. 그 와중에 의병 모집을 핑계로 세력을 모은 이몽학(李夢鶴) 등이 1596년(선조 29)에 난을 일으키고, 여기에 의병장 김덕령이 무고로 연루되어 옥사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로써 의병 활동은 위축되었고, 의병 출신들의 조정에 대한 신뢰는 더욱 떨어졌다.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김덕령이 체포되었을 때 곽재우의 이름도 거론됐다. 다행히 곽재우는 죄가 없음을 인정받아 곧 풀려났다. 그러나 본래 관직에 뜻이 없는 선비였던 곽재우는 억울한 누명을 당하고 교유하던 의병장 김덕령이 옥사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출사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더구나 통제사 이순신이 죄 없이 잡혀 오는 것을 보고서는 더욱 관직에 미련이 없었다. 조정에서는 계속 관직을 내렸지만 곽재우는 정유재란 때를 제외하고 출사하지 않았다.
- 6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